우리 사회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변화의 계기 마련해야

사회적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고통과 억울함에서 오는 신음과 하소연이 넘쳐난다. 하지만 정부나 정치인들은 이들의 신음과 하소연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진상 규명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권은 진상규명이 거의 불가능한 방식을 진상규명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던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고 유가족들의 정당한 요구를 잠재우려는 말들이 난무한다. “이제 경제가 살아나려는데 세월호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세월호 밖엔 문제가 없나?” “이제 그만, 지겹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잔다. 답답하고 황당한 노릇이다.

고통과 억울함에 짓눌리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연대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이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열쇠를 틀어쥐고 있는 이들은 당사자들과 연대자들의 외침과 요구를 외면한다. 그래서 사태는 몇 년씩 계속되기 일쑤다. 피해자들은 계속 길거리에 나와 외쳐야 한다. 그 대가로 평범한, 그렇기에 너무나 소중한 일상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으로 잔인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냥 이 정도로 끝내지 그래. 그래도 버티겠다고? 그럼 한번 해 보든지!” 억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이런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는 무기력해지기 쉽다. 사실 무기력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기제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에 빠진 채 ‘자립적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자립적 인간은 자신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능력, 삶의 방식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뜻할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을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는 어떤 사람을 키우려 하는가? 현재의 교육 체제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정해진 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리와 진실을 알려하고 따르려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기존의 체제와 제도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아닌가? 우리 젊은이들은 자립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아니 알고 싶지도 않도록 교육된다. ‘자립적 인간’이 아니라 현실에 무기력하게 순종하고 순응하는 ‘효율적 인간’이 양산되고 있다. 하지만 무기력은 민주주의를 좀먹는다. 자립적 인간의 실종과 함께 민주주의도 사라진다.

전망이 아무리 암울해도 무기력에 우리를 내맡겨선 안 된다. 그러기엔 문제들이 너무나도 심각하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변화도 없이 상황은 계속 악화될 뿐이다. 비극이 나를 덮치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여, 전망이 암울할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사회적 고발이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지러운 시기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 불의에 대한 외침과 고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예언자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들에게 경고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예언자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고, 불의와 악을 고발하는 것은 예언자의 회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에제키엘 33,7-9)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위험사회’로 진입한 오늘날, 예언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가 겪는 참사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근대성을 성취한 국가에 내재된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재화된 위험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으뜸가는 가치와 목표로 여긴 덕분에 가능했던 ‘발전’의 결과이며 대가다. 그러니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위험은 계속해서 현실화될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여객선 세월호가 저토록 허무하게 바다에 수장될 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배에 갇힌 승객들이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하리라 어느 누가 짐작했을까? 그 기괴하고 참혹한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생방송으로 지켜보리라 어느 누가 생각했을까? 이윤이나 효율을 이유로 구조적으로 내재된 위험요소들을 방치하지 못하도록 외치고 고발하는 예언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는 까닭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대형사고의 가능성은 커진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고의 원인이나 가해자가 대부분 정부, 공기업, 대기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 어렵고 문제의 해법도 찾기 힘들다.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배상과 보상을 받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용산참사를 보라. 4대강사업을 보라.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보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보라.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는가? 세월호 특별법이 절실한 이유다.

▲ ‘쌍용차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마지막 미사에서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지금여기

참으로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세월호 참사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니 이 같은 사회적 악순환을 끝내려면 반드시 변화의 전환점이 되어야만 한다. “저 배, 우리 아이들도 탔었는데” “저 배, 우리 아이들도 탈 예정이었는데” 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나와 내 가족을 빗겨갔지만, 언제든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사건임을 절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는 세월호에 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는 세월호에 타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람 모두다. 위험은 누구에게나 비수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고 있다.

“고발한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나?” 이렇게 푸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예언자가 할 바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것, 불의를 드러내어 고발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예언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모두 예언직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회적 고발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도 악인의 행실에 공동책임을 지게 된다. 위험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고발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을 과거와 비교해보면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사실, 집권층과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회심으로 이 같은 변화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변화는 언제나 권력의 횡포를 보고 이를 고발하는 예언자들, 힘없는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권력자들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조롱과 멸시와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분명히 일어났다. 예언자들이 요구했던 그런 변화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외침과 고발이 당장 가시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자. 무기력해지지 말자. 대부분의 변화는 승리를 통해서 온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변화는 패배나 좌절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패배나 좌절을 통해서 왔음을 기억하자. 아무리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왜곡된 현실과 세상의 악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은 악을 극복하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승리가 아니라 철저한 패배와 좌절,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둔 예언자, 예수의 말씀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