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 21,4-9 요한 3,13-17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 중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이고 이스라엘 최고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람은 물과 영으로 세례를 받아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지상의 한 생명체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그분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 안에 구원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믿으며 신앙인이 된 사람들이 기록해 남긴 문서입니다. 그들은 그 기록을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렸던’ 일에다 비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민수기는 ‘구리 뱀’의 고사(故事)를 설명하였습니다. 기원전 1200년 경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살이를 하던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반도를 헤매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이 사막의 불 뱀에게 물려 죽어 가고 있을 때 모세는 구리로 뱀 모양을 만들어 손에 들었고 뱀에 물린 사람들은 그것을 쳐다보고 나았다는 전설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전설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우리를 치유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안식일이었다고 자주 말합니다. 예수님이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낫게 한 이야기(요한 5,9) 또 맹인을 고친 이야기(요한 9,14) 모두를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안식일, 곧 하느님의 날에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병을 고친 후,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며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 혹은 “하느님의 일이...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9,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한 여인을 돌로 치려할 때, 예수님이 그 여인을 그들의 마수(魔手)에서 건져낸 이야기가 같은 요한복음서(8,1-11)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1-32).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 하느님의 진리이고 용서하고 살리는 그 진리를 실천할 때 사람은 사람다운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렸다고 장황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최고회의가 그분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실(11,45-53)도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제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여 참으로 자유롭게 살라고 우리에게 알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야’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비극을 당하셨듯이 비록 피해를 입더라도 그 자유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내 한 사람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천박한 욕망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삶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쁘게 삽니다. 이웃의 것을 빼앗거나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아도, 이웃을 제대로 쳐다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삽니다. 우리는 생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세상이 주는 해악(害惡)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길에는 교통사고의 위험, 바다에는 세월호와 같은 대형 참사의 위험이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유괴될 수 있고 재물의 거래에는 사기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직장이나 가정도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불 뱀’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실제로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불안을 안고 또 상처를 받으면서 긴장하고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삽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로 우리 삶의 중심을 잡으라고 말합니다.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한 슬기로움에 우리의 구원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이웃들을 돕고 살리는 노력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한 수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교섭을 잘 하여 그분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 내는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말하는 신앙은 다릅니다. 자기가 비록 희생하더라도 이웃을 위해 하느님의 선하심을 실천하는 데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 8월16일 124위 시복미사 장면,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김용길

그리스도 신앙인이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 삶의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행보(行步)를 올바른 것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불 뱀’에게서 우리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강함과 화려함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여 하느님도 이웃도 소홀히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강하고 더 화려하기 위한 경쟁에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우리가 거짓 없이 참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십자가가 있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좌절과 숙연함이 있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삶에서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은 십자가를 넘어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초대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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