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며칠 동안 조문을 벼르다 어제(19일) 명동에 나가보았다. 회의가 있어 가는 김에 하려고 미루던 차였다. 그런데 명동성당 앞은 조문을 끝내고 내려오는 사람, 기다리고 있는 사람, 조문을 마치고 연도를 바치려고 서 있는 사람, 미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연히 조문은 꿈도 못 꾸고 마침 회관에서 진행되는 연도에만 간신히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우선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는 모습에 놀랐고, 신자가 아닌 분들이 많은 것에 더 놀랐다. 서너 시간을 기다리는 데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도 놀라웠다. 사실 명목이 교회장이지 국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교회가 세상에 문을 열고 살았던 보답이 이 광경일 것이리라.

회의가 끝나고 참석한 분들과 함께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으뜸 주제는 단연코 역사상 유례없는 조문행렬과 추기경이 한국교회사에서 갖는 의미였다. 그러나 추기경 이후의 시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으로 대변되는 가톨릭의 대사회적 역할은 엄밀히 말해 8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줄어 실질적인 포스트 김수환 시대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래도 지난 20년은 당신이 생존하고 있었기에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를 감히 붙일 수 없었으나, 이제 떠나셨으니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인 면에서 '포스트 김수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신문, 텔레비전 기사가 전달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과 현재가 너무나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많은 기사들이 그분이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였고, 교회와 고위성직자의 벽을 허물며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가시는 길도 소박하고 검소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한 곳이 명동성당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외형적으로 커진 현재 보다 신자도 적고 돈도 없었던 그 시절, 곧 일반국민이나 교회나 처지가 비슷했던 시절에는 교회의 눈높이가 높지 않았다. 제도의 틀도 강하지 않았다. 신자들의 생각도 성직자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눈높이를 낮춰 국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요가 있을 때 나설 수 있는 최고지도자가 있었다.

그런데 추기경 서거 직전에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명동성당의 벽은 높았고, 더 이상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개방되지 않았다. 교회는 더 이상 '공적 의제(public agenda)'를 만들어 내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신자들도 자신들의 신앙생활에만 관심을 가질 뿐 교회 바깥에 관심을 거의 갖지 않았다. 성당들은 과거에 비해 부유해졌고, 모든 교구는 아니지만 일부교구들에서 성직자들도 풍요로워졌다.

사회적 역할은 줄이면서 교리의 벽은 두텁게 하였다. 교회가 가진 것이 없었던 시절에 오히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는데, 정작 돈과 사람을 가장 많이 갖게 된 지금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애도가 그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렇게 변한 교회의 모습에 대한 애도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신문에서 추기경에 대한 뜨거운 추모 열기를 고인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지만, 한국사회가 정신적 지도자 또는 정신적 의지처를 잃은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이 기사들이 종교의 역할을 주문하는 것으로 읽혔다. 종교가 매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반국민의 눈으로 호소하는 것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이제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을 것인가? 고인은 오늘 영면하시지만 그분이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새로운 자세와 역할을 요청하고 있다.

박문수/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문화영성대학원 초빙교수,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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