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백찬홍]

지난 8월 26일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이 “세월호 아픔 이용해선 안 되며 유족도 양보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이 일었고 그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우선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 중립을 없다”고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어서 그분이 왜 무리수를 둔 것인지 궁금하다.

▲ 지난 3월 4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서임 감사 미사에 참석한 염수정 추기경 ⓒ지금여기
우선은 염 추기경의 보수적 성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4대조 할아버지가 순교한 경기도 안성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7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에서 주로 본당 주임신부와 가톨릭대학교 사무처장, 교구 사무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주로 사목 일선에서 일했다. 이후 2001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2002년 주교 서품을 받은 뒤 2012년 마침내 정진석 추기경의 뒤를 이어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14대 서울대교구장 겸 대주교로 정식 취임했다. 주교품을 받은 대부분의 고위성직자들이 사제 시절 주로 학자로 명망이 높았거나 로마 등에서 유학생활을 오래했던 것에 비해 그는 주로 국내에서 관리형 교회 행정가로 성장하여 고위직에 올랐다. 어떤 면에서 대부분 교계 관계자들이 인정하는 특유의 성실성과 끈기가 진가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에 대한 규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2014년 2월말 추기경 서임을 받기 위해 로마에 머물면서 염수정 추기경은 “정의구현사제단은 1987년까지만 해도 매우 중요한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지만 오늘날 정치 환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맞서 싸울 독재정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기존 방법론을 고집한다면 사회의 주변부(변두리)로 밀려날 것”이라고 비난할 만큼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다. 이런 태도는 추기경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편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염 추기경이 정부 여당의 손을 들어준 또 다른 이유는 전례가 없는 정부의 대대적 협조를 받아 프란치스코 교황 주재로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거행했는데 교황이 퍼레이드 도중 차에서 내려 김영오 씨를 직접 위로하는 등 상상을 넘어선 행보로 세월호 유가족에 동조하는 여론이 커지자 청와대에 빚졌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다. 실제 정부 측에서는 타종교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 다른 것은 몰라도 광화문 시복식만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염 추기경을 비롯해 천주교 방한준비위원회가 거의 막무가내 식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정부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이 아닐까.

게다가 염 추기경은 조선 말기 가톨릭 신자들이 처형당한 염천교 인근 서소문공원을 성지화 하는 사업에 열과 성을 다 바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향후 정부 측의 협력을 받아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부 측과 어긋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서소문 공원은 천주교 순교자들만 처형된 것은 아니며 조선 개국 이래 다양한 계층이 사형당하던 곳이기 때문에 천주교가 이곳을 독점 소유할 권리나 명분이 없다는 의견이 교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의 행보는 염수정 추기경의 태도와 비교된다. 자승 스님은 8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교황 집전 미사 때 비표를 분실해 입장을 저지당했다가 겨우 들어가고 한 천주교 신자로부터 개종 권유를 받는 등 굴욕을 당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불교계 내에서 논란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자승 스님은 이에 개의치 않고 교황이 한국을 떠난 이후인 8월 21일 여러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39일째 단식하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김영오 씨를 직접 만나 위로하면서 “유민이 아빠가 바라는 소원 성취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오히려 염 추기경이 해야 할 역할을 먼저 한 것이다.

그러자 염수정 추기경도 부랴부랴 다음날인 8월 22일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했으나 김영오 씨는 건강악화로 이미 서울 동부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사람들이 ‘어떤 기도문을 줄 수 있는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묻자 “마음이 아프시면 마음에 그대로 담고 계시라”는 엉뚱한 답을 했고 급기야 8월 26일에는 유가족 양보 발언까지 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자승 스님도 8월 31일 ‘세월호 문제가 정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유가족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염 추기경은 교황이 지난해 11월 사제들에게 “조직의 안위에만 치중하는 교회가 돼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개입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신발에 거리의 진흙을 묻힐 수도 있어야 한다. 나는 교회가 좀 더 깨지고 상처 입고 더러워지기를 원한다”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은 셈이 된다.

물론 염수정 추기경의 행동은 성장을 도모해야 할 한국천주교의 현실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교회 운영방식은 과거 한국 개신교의 부정적 유산인 물량주의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당장은 달콤하겠지만 결과는 눈에 보인다. 염 추기경의 발언이 계속 논란이 되자 천주교 바깥 이웃 종교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에 어려울 줄 알았더니 염 추기경 덕분에 한 시름 놓았다”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기득권 편이 아니라 약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의 미래가 거대한 성전과 성지 조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 추기경은 더 이상 세월호 유가족처럼 고통받는 자들의 상처를 소금으로 문지르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그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머물렀던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에 그 자신이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분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이 될 것이다.
 

백찬홍 (씨알재단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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