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9월 15일, 이날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서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노라'고 결정적인 대답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제가 되면서 '세상에서는 죽겠노라고' 하였으나, '그리스도안에서 살겠노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곧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것을 예감하는 것이다. 예수 역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유대 땅에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기쁜소기'(복음)을 선포하였으며, 그 결과 로마와 유다의 지배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믿었던 예수는 세상 속에 살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죽어서도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이었다.

민족과 겉도는 교회 안에서 

그는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지 통치아래서 공부를 한 셈인데, 소박한 필부의 꿈을 접고 어머니 서중하의 영향을 받아 형 김동한 신부처럼 소신학교(동성상업고등학교 을조)에 입학했다. 당시 교회는 식민지교회로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관장하고 있었으며, 교회는 민족현실에 대한 참여보다는 교회 안위를 더 걱정하였다. 그리고 전시체제아래서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등에 천주교회 이름으로 참가하며 협력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신학생들의 마음이 고위성직자들의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3.1만세운동 당시에 신학생들이 참가하다 학교에서 제적되거나 정학을 당하는 일도 있었고, 일부 한국인 사제들은 정규하, 윤예원 신부처럼 의병과 독립군을 지원한 사례도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교권의 문책을 받곤 했다.  

이 상황에서 김수환 역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신학교 사감선생한테 일제를 비난하는 일기가 발각되어 고초를 겪기고 하였고, 수신 시험을 치르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문제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써서 퇴학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한편 교회에서는 일제의 장기지배를 당연시하면서 김수환을 로마가 아닌 일본의 죠치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1944년 초에 학병으로 동원되었다. 처음엔 사관후보로 입대하였으나 민족감정을 드러내 결국 일등병으로 도쿄 남쪽 후시마섬에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김수환은 민족현실과 동떨어진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에 울분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세례를 받은 사제

김수환은 사제서품을 받고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에서 본당사제로 잠시 일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폐허가 된 지역의 주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문득 1956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유학은 그에게 앞으로 전개될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상을 접할 기회였다. 그는 뮌스터대학에서 1963년까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는 가톨릭교회가 커다란 변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1958년에 요한 23세 교황이 즉위하고, 이듬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요한 23세는 파시즘에 동조한 혐의를 받았던 비오12세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상 안에사 봉사할 의무가 있는 '교회의 쇄신'을 촉구하였다. 교황은 <어머니와 교사>라는 회칙을 통해 권위로 세상을 가르치는 것보다 가련한 인생들을 어머니처럼 품어내는 자비를 강조했다.   

그가 독일에서 귀국해서 <가톨릭시보사> 사장을 맡았을 때는 이미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진행중일 때였다.  그는 시시각각 들어오는 공의회 소식을 접할 수 있었고, 봉건적 사고방식과 틀에서 벗어나려는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한국교회에 전달할 수 있었다. 교회는 권력의 위계가 아니라 봉사의 수단이며, 인간의 얼굴을 가져야한다는 것,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함으로써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의회가 끝나는 시점을 따라서 1966년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1968년 서울대교구장이 되고 1969년 추기경에 임명됨으로써 한국교회의 전격적인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한국교회의 세대교체 

해방 이후 줄곧 한국교회의 수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는 친일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미군정을 전후하여 교회의 정치세력화에 몰두하여 '정치주교'라는 딱지가 붙어 있던 인물이었다. 노기남 대주교로 상징되는 이 당시 교회 지도층은 극렬한 반공주의와 내세지향적 신앙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획득을 통해 교회의 안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그 결실 중 하나인 장면 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민주당 정권이 군사정권으로 대체되면서, 끝모를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교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등장은 바티칸공의회만큼이나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 역사의 전면에서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두봉, 윤공희 주교 등 새로운 이름을 한국역사 안에서 의미있게 새기게 된다. 이들은 이후 주교단에서 줄곧 소수였지만, 세계교회와 한국사회의 절박한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무엇보다 추기경이 함께함으로써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서울대교구장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매스컴이나 사회의 관심은 한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기대"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교회만은'하는 바램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응답했다. 그가 교구장 착좌시 내세운 사목표어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관심이 단순히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고통받고 신음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머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히 한국교회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1968년에 이미 중남미주교회의는 메델린에서 "민중을 불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양심의 의무라고 천명하였으며, "세계평화를 위해 결정적으로 현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중의 교회로 가는 길을 선택한 중남미주교회의의 결정은 중남미에 만연한 군사독재정권 지배라는 상황에서 나왔으며, 동일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적극적으로 소개되었다. 19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3선개헌을 강행하고, 유신체제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반민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뒷심

1971년 1월 20일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하였고, 1월 28일에는 김대중 후보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10월에는 위수령과 휴업령이 내려졌으며,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12월 21일에는 공화당이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려고 했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는 곧 반국가적 행위이며 북한과 같은 이적단체를 돕는 행위로 규정하여 무소불위의 대통령에 의한 군부통치를 강행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 당시 주교단은 12월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하고 전국 각교구와 본당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교회의 안에 '사회정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대하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2월 25일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물으며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의 반민주적 성격에  대하여 비판했다.  

유신정권과 교회의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다.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와 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지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다시 감옥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등장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 당시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첫째,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상의 여기, 이곳의 현실 한가운데라는 것 둘째, 우리가 현실로부터 초연해지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르지도 않거니와 현실이 우리를 초연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는 것, 세째,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바로 여기 이곳의 현실 속에서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가지며 소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1993년 지학순 주교가 선종했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장례미사에서,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에 항거한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정치와 구조악에서 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 주교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김수환 추기경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후 행보는 김 추기경이 그처럼 무력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연민의 시선을 가졌으며, 그 연민이 때로는 정치적 항거로, 사회적 관심으로,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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