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리본을 유족에게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해줬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후 귀국길, 기내 기자회견 내용이다. 방한 중 세월호 유족에 대한 교황 자신의 개인적인 심정을 밝히신 것이리라. 하지만 교황의 평소 말씀이나 행동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일반화해서 알아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는 말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천주교 단식기도회’ 현수막에 쓰여 있듯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로 읽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고통 받는 사람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여기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앞에서 중립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 앞에서 중립이 가능한가? 고통을 못 본 체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중립인가? 그런 중립적 처신은 고통의 원인이나 제공자에 대한 암묵적 옹호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묵인과 타협일 뿐이다. 그리고 고통은 계속된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른바 ‘수난예고’ 대목에서 우리는 고통을 두고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예수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마태 16,21-27)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당시 유대사회에서 권력 핵심의 상징이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 예루살렘에 가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의 삶을 계속 밀고 나가면 결국 그런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예수 자신의 예감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고향을 떠나 세상에 나오신 후 줄곧 가난한 사람들, 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실현했고, 이를 누리고 있었다.

예수와 함께 온 하느님 나라가 부각될수록 당시 유대 사회의 전도된 가치, 불의한 권력의 실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러니 예수와 예수의 행적은 당시의 권력층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가 지금까지의 행적을 예루살렘까지 계속한다면 결과는 고난과 죽음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리고 예수는 끝까지 그렇게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베드로가 생각하기에, 그래서는 안 되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베드로의 반응이었다. 이 말에는 “주님, 그렇게 계속하시면, 그렇게만 나가시면 곤란합니다.”라는 뜻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존경하는 스승인 예수 개인의 안위도 염려했겠지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 전체가 당시 권력층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맞을 파국을 더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베드로의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중립! 권력과 너무 충돌하지는 말자. 어느 선까지 적당히 하자. 뭐, 이런 것 아니었을까? 베드로는 부지불식간에 예수를 자신들의 걸림돌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의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중립은 없다. 불가능하다. 예수가 중립을, 침묵을 지키는 것은 당시의 힘없는 많은 사람들을 사회에서, 인간적인 삶에서 배제시켰던 힘센 자들,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을 묵인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자신의 삶의 포기와 부정을 뜻할 것이다. 예수가 베드로를 사탄이라며 호되게 꾸짖은 이유도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스승인 예수는 호된 질책으로 베드로가 현실을 제대로 보도록 깨우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가 걸어온 길,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 정의의 길, 평화의 길이다. 예수가 해온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 진리, 사랑, 정의, 평화다. 그가 누구든, 이를 저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적, 바로 사탄이다. 지금으로 치면 교황에 해당되는 베드로가 바로 이런 질책을 받았다. 예수가 걸어왔고 걸어갈 길, 예수가 해왔고 해 나갈 일, 하느님의 길, 하느님의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족의 아픔을 이용해선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떠나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우리가 들은 말이다. 이 말만 떼어놓고 들으면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면 이 말은 결국 세월호 유족들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뜻이다.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다. 세월호 유족들은 물론 쌍용차 해고, 용산참사, 강정 해군기지,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등 불의로 인해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진솔한 연민을 보여주고 진심으로 함께 아파했던 교황께서 떠나신지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우리가 들은 발언이다. 어이없고 슬픈 일이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직책이 아니다. 사랑과 진리와 정의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직책은 결코 변수가 될 수 없다. 여기서는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주교나 무명의 신자나 모두 똑같다. 최고 권력자나 무명의 시민이나 모두 평등하다. 기준은 단 하나!사랑으로 살았느냐? 특히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연민으로 다가갔느냐? 아니면 중립이란 이름으로 외면했느냐?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중립을 지키며 자신의 길을 계속 갔느냐? 아니면 가던 길을 멈추고 고통 받는 그 사람에게 다가간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통 받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하느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기준은 단 한 가지, 바로 이것이다. 사랑과 연민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 다가섰는가? 연대했는가?

세월호 참사를 둘러싸고 유가족과 선의의 시민들, 그리고 정부와 정치권이 대립하고 있다. “유가족도 양보해야 한다.” 동일한 분의 발언이다. 하지만 진리와 진실을 두고 타협이나 절충은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을 두고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순교가 생기는 것 아닌가? 진리와 진실의 영역에서 절충이나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거짓의 옹호나 묵인, 변절과 배교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 예루살렘 파괴를 보고 울부짖는 예레미야. 일리야 레핀(1870)
세월호 참사의 유족이나 우리나 모두 힘이 없다. 저쪽은 엄청난 힘, 합법으로 무장한 공권력을 가지고 있다. (저들의 권력을 내가 낸 세금으로 유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어떤 소설 제목처럼, 당장 ‘남쪽으로’ 튀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만 그랬던 건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도 우리와 마찬가지 꼴이었다.(예레 20,7-9)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외치던 세상의 불의한 현실을 폭로했던 예언자, 하지만 힘없는 예언자였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한갓 조롱의 대상, 놀림감에 불과했다. 우리 또한 사람들, 특히 권력자들의 눈에는 예레미야의 꼴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셨다.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외치는 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한 예레미야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누구보다도 더 충만히 살아 있는 것이다.

수난예고 이야기의 뒷부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이렇게 가르침을 주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든 제 목숨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제 목숨’이란 영원한 생명과의 관계,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뜻할 것이다. 이 관계를 우리가 온전히 보존하는 한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는 생명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참으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어, 용기를 내어, 예레미야의 외침을 우리의 외침으로 삼자. 아무리 내가 힘들다 해도 아닌 것은 아니 것이다. 아무리 내가 약해다 해도 거짓은 거짓이다. 아무리 저들이 강하다고 해도 불의는 불의다.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과 불의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세상에 이것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의 놀림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해도,광장에 나와서 함께 외치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예수의 사랑과 연민이 우리를 고통 받는 사람들로 이끌고 있다. 그래, 사랑과 연민의 힘으로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깨어 있자. 쓰러져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손을 잡자. 그렇게 함께 세상을 바꾸어나가자. 예수께서 갈망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세상이 되도록 하자.

잊지 말자!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바로 깨어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가 바로 세상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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