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두봉 주교 (전 안동교구장)

 

안동교구장 시절 두봉주교(사진출처/안동교구 홈페이지)
1970년대와 80년대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뜻을 나눌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주교 가운데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가 있다. 당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실마리는 인천교구의 나길모 주교의 노력이 있었지만,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유신정권을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양심선언>으로 투옥되고 나서, 김수환 추기경은 지학순 주교와 그의 동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두봉 주교, 그리고 광주대교구의 윤공희 대주교가 그림자처럼 함께 하였다.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두봉 주교(80·본명 렌 뒤퐁)는  잔다르크로 유명한 프랑스 오를레앙 가까운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신학수업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어 한국전쟁으로 성직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5명의 사제와 함께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이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도심에서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으면서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흥동 성당 주임이었던 오기선 신부가 지어준 것이다. 학창시절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경험했던 두봉 주교는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사는 아이들의 움집을 드나들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되자 1969년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맡으면서, <서울신문> 2007년 9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주교서품을 받으면서도 누구나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았다. 두봉 주교는 "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하면서 평생 문장과 사목표어를 없이 교구장직을 수행했다. 

한편 안동 교구장으로 일하면서도 늘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네차례에 걸쳐 교구장 자리를 내놓으려고 교황청에 탄원을 내기도 했다. 결국 1990년에 교구장을 사임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들고,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웠으며,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했다.

흔히 두봉 주교를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고 부르는데, 이는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 때문이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폭로하며 저항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유신정권은 두봉 주교에게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는 정년을 15년이나 앞두고 교구장직에서 사임하고, 고양시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지내며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에 6년째 살고 있다. 밭에서 푸성귀도 재배하며 가끔 피정지도도 하고 있다.

두봉 주교는 사목표어는 없지만 마음속에 "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라는 생각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두봉 주교가 은퇴한 뒤에 안동교구 사제들은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두봉 주교의 생각이 닿을만한 말이다.  

<지금여기>에서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청했다. 두봉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이 주교회의 의장 하실 때 한 달에 한번 정도 만났다"고 하면서, 두봉 주교는 주로 지학순 주교와 인연이 깊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거리상 자주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얼마전에 읽은 장익 주교의 책을 거론하며 "김수환 추기경이 처음 서울교구장으로 오셨을 때 장익 신부(현재 춘천교구장, 주교)가  많이 도와준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추기경은 "자신을 보잘 것 없고  그저 심부름군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편"이었으며,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아주 겸손한 분이란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두봉 주교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인상을 풍기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 이 이야기 좀 해달라"며 주변의 의견을 들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참 좋았다"면서, "충분히 남의 이야기를 듣고 참고한 뒤에,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분명하게 입장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두봉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바라던 지도자의 덕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느님 백성의 심부름꾼이며, 듣고 배울줄 알고, 겸손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두봉 주교는 "대개 주교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고, 누가 뭐라하면 왜 가르치려 드느냐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 추기경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한편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말년에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사회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 "나이 때문이 아니겠는가"하고 답했다. 두봉 주교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좀 보수적이 되고, 저도 모르게 취하게 되는 행동이 있다는고 말한다. "70-80년대에는 추기경이 40대였고, 윤공희 주교와 나길모 주교도 40대였다. 지금은 주교들 나이가 평균 65세는 되는 것 같다. 거의 70이 다 되어가니 젊은 사람들 생각과 좀 다를 수밖에 없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생각도 별로 깨이지 않는 법이다"

두봉 주교와 인터뷰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인물에게 내어준 속내를 알 것 같다. 그가 70세 넘어서까지 교구장직을 탐하지 않은 까닭은, 교구장 역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목을 시작할 수 있는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봉 주교는 사목자의 가장 큰 덕을 '많이 듣는' 데서 찾았으며, 육신의 요구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장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