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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온 해님 같은 사랑[할머니 탐구생활 - 13]

때 아닌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날이 좋았다면 가을 햇살에 이것저것 널고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해가 없으니 뭘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빨래도 불 땐 방에 널어서 간신히 말리고 붉은 고추도 아랫목에 펼쳐 놓고 몇 번씩 뒤집어 준다. 이렇게 고추를 위해 아랫목을 양보한 지도 여러 날이건만 아직도 마를 생각을 안 한다. 이러다 곰팡이 나서 다 버려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쌍지 할머니 말마따나 날씨는 하늘이 하시는 일. 내가 어쩌려고 해 봐야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잠자코 기다리며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막막하고, 불안하고, 답답하다. 눅눅하고 습한 기운이 몸속 깊은 데까지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내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 같다. 이럴 때 딱 한 시간만이라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쬔다면 얼마나 좋을까? 햇빛 샤워기 아래 서서 햇빛을 온 몸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비가 와서 며칠째 집안에만 있었더니 밖에 나가고 싶어서 난동을 부리는 거다. 다울이는 비가 오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을 피해 슬쩍슬쩍 밖으로 나가서 놀고, 다랑이는 그런 형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자기도 데려가 달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박다울 얼른 들어와. 비 오는 데 뭐 하는 거야? 네가 나가니까 다랑이도 나가고 싶어 하잖아.”
“엄마, 비 쪼금밖에 안 오니까 나들이 갔다 오자. 우산 쓰면 되잖아.”

나는 “안 돼! 이러다가 또 갑자기 쏟아진단 말이야.”라고 하려다가 “그럴까?”라고 고쳐 말했다. 너무 오랫동안 “안 돼!”라고 소리치는 간수 역할을 했더니 신물이 나기도 하고, 애들 못지않게 나 또한 너무 갑갑했기 때문이다. 우산을 쓰고서라도 실컷 걷고 싶었다.

“야호, 신난다.”
“까아! 까아!”

   
▲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흘러내려 온 냇물이 더 큰 물살을 이루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세차게 흘러간다. 끝없이 내리는 이 비에는 함께 힘차게 흘러가 큰 목소리를 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정청라

아이들은 신이 났다. 길 위로 철철 흘러 내려가는 빗물을 밟으며 마구 내달리고 물웅덩이를 만나면 물 만난 고기마냥 신이 나서 첨벙거리며 놀았다. 나는 “조심해! 그러다 옷 다 젖는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말을 하면서도 이게 하나마한 한 소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장난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에게 그 무슨 소리인들 제대로 들리리오. 게다가 불어난 냇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소리에 묻혀 세상 모든 소리가 다 함께 떠내려가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울아! 다울아!”하며 다울이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소리실 할머니! 멀리서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듣고는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다른 한 손엔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든 채로 말이다.

   

▲ 산에서 내려온 물이 깜짝 폭포를 만들었다.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정청라

“할머니, 비 오는데 우산도 안 쓰고 어딜 가세요?”
“다울이 엄마여? 아그들 멕이라고 포도 한 송이 갖다 줄라고 나왔는디 오다가 자빠져 가꼬 말이여. 물캐져서 못 쓰겄으믄 집이라도 잡숴. 이거 더런 거 아니여. 우리 딸이 휴가 옴시로 한 박스 사가꼬 온 거시여. 내삘지 말고 집이라도 잡숴봐. 어제는 도란땍 갖다 주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헤매다가 자빠지고, 오늘도 조심히 온다고 왔는디 미끄라져 가꼬 아깐 거 낼차 블었어. 그래도 손으로 만져봉께 괘안은 거 같은께, 깨까시 씻아서 잡숴. 얼마 안 되아도 우리 딸이 사 왔응께 고루고루 노놔 먹어야제.”

할머니는 딸이 사 온 귀한 것이니 마을 사람들과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며칠째 이웃들에게 포도 선물을 돌리고 계셨던 것이다.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앞이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찾아 가면서 말이다.

할머니가 내미는 분홍 보자기를 받아들며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내가 빗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더듬더듬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다가왔다. 그렇게 귀한 포도 한 송이를 거저 얻어먹으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했다.

“할머니, 정말 잘 먹을게요. 한 알도 안 버리고 맛있게 먹을게요.”

나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는 우산을 받쳐 든 채 할머니를 집까지 바래다 드렸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 할머니가 넘어진 자리에 할머니가 미처 다 줍지 못한 포도알들이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엄마, 여기 왜 포도가 있어?”
“소리실 할머니는 눈이 안 보이시잖아. 넘어져서 포도를 떨어뜨리셨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그걸 다 줍지 못하셨나 봐. 우리 이거 마저 주워 가자.”

다울이와 나는 빗속에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포도알을 주웠다. 그 포도가 얼마나 귀한 포도인지 잘 알기에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깨끗이 씻어서 한 알도 남김없이 꼭꼭 씹어 먹으리라.

그런데 포도를 먹으며 다울이가 물었다.

“엄마, 이 포도 약 친 거야?”
“다울아, 이 포도는 약을 치고 안 치고를 떠나서 아주 귀한 포도야.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잖아. 이건 그냥 포도가 아니라 할머니 마음이고 사랑이야.”

우리는 그렇게 할머니 사랑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포도 한 알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자 내 마음속에 환한 해님이 들어온 것 같았다. 이제 좀 더 의연하게 해님 나오시길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 비에도 지지 않고 씩씩하게, 오늘 내 몫의 사랑을 살자. 그게 해님을 부르는 최고의 기도인 것을 소리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셨으니까.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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