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방한 이후 주교님들께 드리는 공개편지-3

며칠 전 염수정 추기경께서 광화문 농성장에 방문하셔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셨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40일 가깝게 단식하던 김영오 씨가 병원으로 이송된 뒤여서 뒤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동안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 준비로 무척 바쁘셨고, 교황께서 다녀가신 뒤라 마무리할 사안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주변에서는 명동성당에서 광화문 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린다고 이렇게 늦었느냐는 투정도 있습니다만, 정신적 겨를이 없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들 엄두가 나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방한 내내 세월호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지 않으셨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달고 계셨습니다.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순례를 했던 이호진, 김학일 씨를 만나 위로하고, 그들이 지고 온 십자가를 로마에 가져가겠다고 약속했고, 이호진 씨에게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직접 세례를 주기도 하셨습니다. 시복미사에 앞서 카페레이드를 할 때에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는 곳에서는 의전 차량에서 내려 단원고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와 유가족들에게 특별한 위로의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 광화문 시복미사에 앞서 카페레이드 중에 의전차량에서 내려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를 위로하는 교종 프란치스코  ⓒ김용길

그리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에게 보여준 연대감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걱정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나는) 사제이고, 그래서 당연히 고통받는 사람을 가깝게 여긴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도 이처럼 분명하게 가난한 이들과 배제와 차별로 고통 당하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말을 던진 적이 없었습니다. 교종께서는 교황이 된 뒤로 줄곧 이웃에 대한 ‘무관심의 세계화’를 비판하면서 ‘연대의 세계화’가 필요하다고 호소하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교종께 대한 존경심이 가슴 속에서 울컥이며 올라옵니다.

충직한 교종의 사제가 되어야 할 추기경
“교중미사를 광화문광장에서 봉헌하겠다”고 하신다면...

이런 교종의 마음을 헤아리는 염수정 추기경께서는 8월 22일 처음 방문한 세월호 농성장에서 유가족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마음 아파하는 사안”이라며 “교황 방문 때도 그랬듯 유가족과 항상 같은 마음이다. 고통을 함께 하겠다”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날 유가족들은 추기경께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애써 달라고 부탁했고, 염 추기경은 이 같은 요청에 “최대한 가족과 함께 하겠다”고 답변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방한 기간 중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켜 주셨습니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했으며, 광화문에서는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일정 중에 틈을 내어 이호진 씨에게 세례를 베풀고, 팽목항에 남아 있는 실종자 가족들에게도 위로의 편지를 쓰셨습니다. 이제는 염수정 추기경께서 뒤늦은 방문을 만회하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맺은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여야 합의가 되지 않으니,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대교구장이신 추기경 께서 ‘기도의 최고형태’인 미사를 통해 당신의 진정성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교구장께서 하루를 정해서 주일 교중미사를 광화문광장에서 봉헌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날은 서울 시내 각 본당의 교중미사를 없애고, 광화문 미사에 집중한다고 각 본당사제들에게 전달합니다. 주일 교중미사가 부담스러우시면 토요 특전미사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광화문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겠습니다. 레지오마리애 등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나와 미사 장소의 외곽을 싸고, 교구 사제들이 줄지어 광화문 농성장 앞에 나와 미사를 공동집전합니다.

단순한 농성장 방문만으로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추기경께서 최소한 며칠이라도 동조단식을 하거나, 그 자리에서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교회의 판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이 무익한 것처럼, 실효성 있는 행동 없는 약속은 공허한 입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기경께서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를 이렇게 보여주신다면 추기경께서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충직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물론 추기경의 이런 행동에 ‘정치 개입’ 운운하며 볼멘 목소리로 딴지를 거는 사제들과 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주교들이 반대하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구장 주교가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사목을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적 원칙이며, 복음의 원칙의 핵심은 ‘지금여기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묻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교종께서는 방한 첫날 주교단 앞에서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불가능하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지금 가장 고통 받는 가난한 이웃은 세월호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입니다.

▲ 서소문 성지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을 따라가는 염수정 추기경 ⓒ교황방한위원회

주교의 임무는 교도권 행사... 순교정신 되새겨야
“당신도 교종처럼 우리 편에 서 주실 건가요?”

주교는 교도권을 행사하는 자리입니다. 교도권이란 교리해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권위’ 있는 복음적 판단입니다. 염 추기경께서는 지난 8월 15일자 <서울주보>에 ‘프란치스코 교황께 드리는 편지’를 기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추기경께서는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라는 교종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공동선을 위한 활동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치는 소리는 모두 덧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추기경께서는 이 편지에서 “우리 활동이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비난하고 배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셨지만,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진실을 밝히자는 요청입니다. 그가 대통령이든 정부각료든 기관장이든 해경이든 선박업체든 세월호 참사 관련자들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을 오히려 증인으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광화문 농성장에 가셨을 때 “청와대에 언제 갈거냐?”는 질문에 “(내가) 그렇게 끗발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추기경께서 굳이 청와대까지 가셔서 궁색한 선처를 요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더 복음적입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주교가 거리에 나선 선례는 아주 많습니다. 1977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된 오스카 로메로는 평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적 사목 방침을 염려하는 전통주의자였으며, 1968년에 열린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선언한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슬로건에 반대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 찬 그리스도론’이라고 공박했지만,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다가 군사독재 정권이 사주한 암살단에 의해 피살되면서 회심한 분입니다. 그분은 아길라레스 농민들이 “그란데 신부처럼 당신도 우리 편에 서 주실 건가요?”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로메로 주교는 친구인 그란데 신부가 목숨을 바친 농민들의 얼굴 안에서 고통받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의 장례 미사가 열리는 날 교구에서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도록 조치했습니다. 교구의 모든 신자들이 산살바도르 주교좌성당에 모였고 이 자리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이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입니다”라며 폭압적인 정치권력에 ‘기도로’ 저항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이들과 일치한 사목자 로메로 대주교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8월 18일 한국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를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것을 막던 교리적 문제가 이미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해결됐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이 ‘정치적 죽음’인지 ‘신앙적 순교’인지 가늠해 온 교황청은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사목적 순교’로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가졌습니다. 로메로 역시 이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로 선포되고, 그분의 삶과 신앙과 죽음이 ‘신앙인의 모범’으로 교회 안에서 기억될 것입니다. 17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순교자들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짐이 다짐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주교님들부터 ‘순교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인류에 대한 보편적 구원의 성사가 되려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슬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염수정 추기경과 다른 주교님들에게 호소합니다. 주저없이 망설임 없이 단순한 마음으로 광화문 네거리로 나가시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곁에서 기도하는데 동참해 주십시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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