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에 대한 반박

8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빈곤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김순덕 논설위원의 칼럼이 실렸다.

이 글에서 김순덕 논설위원은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밝히면서 “교황의 청빈하고 소탈한 말과 행동은 경애하지 않을 수 없으나” “경제에 대한 교황의 언급은 진리,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또 교황이 “페론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가 역할을 중시하고 엘리트 공격 같은 포퓰리즘 수법에 능하다”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지적을 인용하며, “가난한 사람을 진짜 도우려면 그들이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논설위원의 칼럼에 대한 이수태 작가의 반박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김순덕 논설위원님

8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당신의 칼럼 <프란치스코 교황의 ‘빈곤 경제학’>을 읽었습니다.

참으로 논리가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선 〈프란치스코 교황의 빈곤 경제학〉이라는 제목부터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교황이지 경제인도 경제학자도 아닙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말할 뿐입니다. 그런 판단과 행동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까지 교황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교황의 발언이 설혹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영향을 악영향이라고 보는 자들의 경제적 관점에서만 그러할 뿐입니다.

당신은 남미의 특수성을 말하고 페론주의의 영향력을 말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가진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교황의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남미 출신의 페론주의자가 가지는 특수성일 뿐 보편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가톨릭 국가들이 모조리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보편성을 넌지시 내세웁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경제적 변수만이, 신자유주의만이 보편성 있는 진리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고 보입니다. 경제에 악영향이 미치고 신자유주의에 금이 가면 그것은 어떤 것이든 의심스럽고 문제 있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반 헤롯 투쟁이나 예수의 천국 임박 선언은 이스라엘 경제를 뒤흔들어 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군요. 부자를 능멸하여 그들은 천국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극언한 예수의 발언도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발언이 되겠네요.

설혹 교황의 가치관과 발언에 따르는 것이 빈곤의 경제학이 된다고 칩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통 칡넝쿨처럼 휘감고 인류를 멸망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희생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까?

▲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영오 씨를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김용길

지상의 남은 진실은 바로 그렇게 숨통을 조여 가는 형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당신은 심각하게 고민해 보셨나요? 아니면 일 년에 5-6%씩 경제성장률이 찬란하게 올라가는 것만이 당신의 천국인가요?

당신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지적임을 빙자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엘리트 공격 같은 포퓰리즘 수법에 능하다"며 그를 무슨 정상배나 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이클 노백이라는 신학자를 앞세워 "프란치스코 교황의 경제론은 가난한 자를 가난에 머물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단정하고 그래서 교황의 말을 따르기 힘들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디에서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은 그의 경제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경제론이라고 본 것은 노백이나 당신이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가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이라며 그것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대만으로는 한참 모자란다"고 당신의 경제론을 펼쳤습니다. 당신에게는 관심과 연대가 사소한 모양입니다. 결국은 해 봐야 별것 아닌 일을 기웃거리기보다는 돈의 질서가 펼치는 저 장엄한 계획에 동참할 것을,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 활성화 법안의 국회통과"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의 글에는 알파도 경제이고 오메가도 경제인데 그 사이 어느 곳에 가톨릭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가 지금 다시 등장한다면 자본주의가 순항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그 곁에 자본주의의 행진에 결코 방해가 안 될, 종교라는 자그마한 영지에 만족하는, 착하고 협조적인 영주가 될 것 같습니까?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영혼의 장신구 같은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종교적 관심은 살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종교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가톨릭 신자로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유례없이 기괴한 이 나라의 몰골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의 이 나라가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다운 사회라고 보십니까?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고 보십니까? 천만리 머나먼 곳에서 온, 그래서 이 땅의 사정을 잘 모를 수밖에 없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행동은 그래도 그런 가치들을 추상적으로나마 정확히 지향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일면 고맙고 일면 그로부터 위안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기도 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고의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경제 일변도로 치우친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차원을 설명하려는 것은 결국 과욕에 불과하고 그런 과욕은 당신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언론인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혹세무민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쓴 칼럼 한 편을 읽고 오늘 저녁이 무척 우울했습니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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