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이제는 애초에 어떤 분위기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건 ‘특급 칭찬’이다. 이럴 것이라고 예상한 시청자의 짐작은 매회 뒤통수를 맞는다. MBC 수목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 이야기다. 적어도 열 번쯤은 몸을 바꾸며 거의 모든 장르를 동원해 ‘하려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 골격 잘 짜는 주찬옥 작가와 진지한 코믹에 탁월한 조진국 작가가 협업을 한 결과는, 기대보다 훨씬 다채롭고 재미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여왕의 교실>을 연출했던 이동윤 PD는 이번에도 2008년 대만 TTV가 방영한 동명의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며 완전 ‘우리 얘기’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 듯하다.

결혼, 타인과의 춤? 과거와의 단절?

초반에는 웬 환타스틱 결혼 장려 드라마가 나타났나 했다. 이만큼 결혼의 매력을 있는 대로 살려(없는 점까지 채워 가며) 시청자를 대놓고 유혹하는, 그것도 박장대소하며 맞장구치게 만든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손 귀한 재벌가의 철없는 후계자 이건(장혁 분)과 착해빠진 것이 유일한 매력인 김미영(장나라 분)은 온갖 우연과 곡절과 착오와 실수가 뒤범벅된 ‘하룻밤’으로 인해 아이를 갖게 된다. 워낙 손 귀하고 남자가 30대에 단명하는 집안인지라, 이건의 할머니인 장인화학 왕회장(박원숙 분)은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기뻐 환호한다. 재벌 회장이 이런 아름다운 말씀을 남기며 가난한 여울도의 사돈에게 결혼을 애타게 간청한다. “원래 우리 집안 주특기가 책임지는 겁니다!”

마카오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는 결국 며칠 만에 부부가 된다. 심지어 건에게는 ‘유일한 사랑’ 세라(왕지원 분)가 있었다. 초반에는 세라와의 어긋남이야말로 운명의 장난처럼 보였다. 결혼 결정은 몹시 힘들었다. 이건은 (사랑하지도 않았던 여자의)‘남편’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억울하고 가위 눌리고 불면에 시달린다. 5분마다 진저리를 치며 깨어난다. 드라마는 이런 심리를 황당 코믹으로 아주 진지하게 그려 시청자를 포복절도하게 했다. 프랑켄슈타인 못잖은 퀭한 얼굴로 “슬금슬금 야금야금 갉아먹는 달팽이”의 악몽에 시달리는 건의 모습은 어쩐지 그 어떤 사실주의적 표현보다 현실적이었다. 이 작품은 그런 식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건은 ‘자기만의 방’으로의 칩거와 번민 속에서도 아이와 아내를 한꺼번에 받아들인다. 미영은 자기와 아이가 남의 인생이 짐이 될까 봐 울고, 착한 미영에게 남의 민폐가 될 인생은 슬프고 고통스럽다. 건은 세라 때문에 운다. 둘은 울면서 결혼식이라는 걸 한다. 어쨌든 둘 다 워낙 매력적이라 시청자 입장에서는 ‘설레는 사랑’이 이제 시작이구나 싶다. 심지어 원래 설정이 ‘선(先)결혼-후(後)로맨스’ 아닌가.

초반에는 엄청 달달하게 극적이고 이벤트적인 ‘로맨스’를 보여주었다. 3, 4회는 임신 사실로 인해 가능한 모든 촌극과 끔찍 발랄한 소동이 난리 법석으로 전개됐다. 물론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설정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극의 중심은 미래에 태어날 아이다. 건은 결혼식 날 미영에게 말한다. "솔직히 나한텐 아직도 세라뿐이에요. 내가 얼마만큼 당신한테 다가갈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아이한테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

사실 장인화학이 여울도의 비누공장을 사들이며 여울도 주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갈등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셈이다. 여울도 비누공장의 박 사장(정은표 분)과 미영 형부(임형준 분)는 섬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여울도 특산물(?) ‘조아그라’로 미인계를 쓰려던 건데, 호텔방에는 (예정돼 있던 여인 대신)엉뚱하게 미영이 잘못 찾아 들어가고 결국 이건은 여울도의 건강한 정기를 물려받은 아이를 얻었다. 말하자면 여울도의 사위가 된 것이다. 이후 이건은 아이의 외가인 여울도의 청정 바다를 위해서도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 억척스런 장모(송옥숙 분)가 하는 작은 음식점 ‘세 딸 엄마 식당’과 여울도 앞바다는 미영이 얼마나 건강한 생명력의 지원과 유대 속에서 성장하고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공포영화를 방불케 했던 미영의 ‘신혼집 입성’ 장면에서 건은 싸늘하게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끔찍한 주문을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이 최악의 말과 스릴러 분위기의 전개는, 실제 결혼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 불통, 단절감을 굉장히 리얼하면서도 표현주의적이고 과장되게 그려냈다. 웃기면서 찔렸달까. 저 과정을 견뎌내지 않고 소통으로 갈 수 있는 커플은 없을 테니까.

결혼하면 할 수 있는 ‘로맨스’?

김미영의 세계는 강력한 생명력의 연대와 지원이 있는, 언제라도 여울도의 강한 음기와 억척스럽고 돈독한 정이 지켜 주는 그런 세계다. 특히 엄마와 언니들은 물론 섬마을 전체를 등에 업은 건강한 여인 미영은 허상뿐이던 건의 세계에 삼신할미가 파견한 사람이다. 그 건강함의 유대가 연약하기만 했던 미영을 모성애로 단련시킨다.

▲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이건(장혁분)과 김미영(장나라 분)(사진출처/MBC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한동안 이 드라마는 뻔뻔할 정도의 ‘결혼 장려극’으로 흐른다. 건은 미영을 ‘달팽이’라 부르면서 처음엔 꺼리나, 점점 ‘달팽이’는 애칭이 되고 미영을 깊이 아끼게 된다. 의도는 이런 듯했다. 아, 결혼하면 알콩달콩 할 수 있는 게 저렇게 많구나! 아, 나도 아내가 입덧할 때 같이 입덧하고 싶다, 뱃속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 주고 싶다, 부부 태교 교실 같이 다니고 싶다, 결혼해서 살면 재밌겠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 예능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방식의 선동질이었다. 배우들은 주연 조연을 가릴 것 없이 신들린 연기를 보여 주었고, 호흡은 갈수록 척척 맞았다. 시청자는 점점 결혼의 달달함과 좋은 점에 반할 지경이었다. 물론 ‘개똥이가 태어나면 이혼한다’는 초기의 계약이 존재했지만, 이건은 자기도 모르는 새 점점 미영에게 빠져든다. 계약서는 곧 휴지조각이 될 것이고, 둘은 운명의 짝임에 분명하다고 시청자는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너무나 멋진 ‘동네오빠’ 다니엘 피트(최진혁 분)라는 변수가 생겨 팽팽한 삼각관계를 이루지만, 갈수록 미영과 건은 애틋해진다. 그런데 둘이 마침내 ‘진짜 사랑’에 도달할 듯이 보이는 찰나, 비극이 덮쳐온다.

한국의 시청자가 익히 잘 아는 ‘비극’이 가히 세트로 온다. 기억상실과 불치병,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 매달리는 남편의 옛사랑……. 구구절절한 신파가 한 방에 다 터진다. 그러더니 이 코드를 활용하기는커녕 단 2회 만에 몸과 마음의 ‘회복’으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비극은 신파가 아닌 다른 코드에서 온다. 어설프게 각성한 남편은 불치병이 재발할까 봐 염려스러워 ‘당신을 위해’ 잔인하게 미영을 떼어놓고 이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아이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왔다가 미영의 교통사고로 인해 허망하게 잃게 된다.

이럴 수가!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던 순간이었다. 혼절했다 대수술 이후 깨어난 미영이 통곡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같이 울었다. 야속할 지경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달달했던 ‘부부 로맨스’는 이제 가장 아픈 상처를 안고 절단 당했다. 차에 치여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이는 꼭 살려 주세요.”라고 애원했던 미영은, 결국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리로 떠난다. 개똥이만 심장에 안고.

질긴 순정, 진화하는 순정

기다림도 그리움도 약으로 삼아 성장할 줄 아는 초강력 순정은 ‘3년 후’ 등장한다. 모든 것은 변했다. 미영과 건, 다니엘의 관계도 많이 변했다. 삼 년 전에는 ‘개똥이 아빠’였기에 이건은 우선순위일 수 있었다. 삼 년 전에도 ‘동네 오빠’ 다니엘은 물샐 틈 없이 미영 곁을 지켰지만 그땐 건의 적수가 아니었다. 미영의 마음은 그때 온통 건을 향해 있었다.

미영은 마카오의 성당에서 다니엘을 처음 보았고 ‘신부님’인 줄 알고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서울에서 재회했을 때도 계속 ‘신부님’이라 부르다가, 디자이너라는 본업을 알린 뒤에는 말하자면 ‘키다리 아저씨’가 된다. 미영을 좋아하지만, 다니엘의 역할은 건에게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미영을 달래 주고 ‘집’에 들여보내는 것이다. 건에게는 “그러니까 제가 선을 밟기 전에 잘 하셨어야죠.”라고 경고하지만 그때 그의 소임은 거기까지였다.

▲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다니엘 피트(최진혁 분)과 김미영(사진출처/MBC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그 러나 삼 년이 흘렀다. 파리에서의 시간들, 화가로 거듭나는 미영을 지켜준 것은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이제 미영에게 청혼을 하려 한다. 삼 년을 하루같이 고대했다. 그녀의 상처가 아물기를, 눈을 들어 옆에 있는 자기를 봐 주기를. 그녀가 외로운 자신에게 ‘진짜 가족’이 돼 주기를. 이건도 긴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건에게 소중한 사람은 미영뿐인데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미영은 ‘포스트잇이 아닌 본드 걸’이 돼 돌아왔다. 이제 그림으로 스스로의 상처는 물론 다른 이들의 마음도 어루만지는 작가가 됐고, ‘쿨’하게 남자를 찬다.

어쩌랴. 상처 준 게 많아 자격 없다고 여겼지만, 이건의 마음 또한 절박하다. 미영을 아니 ‘달팽이’를 놓치고는 못 살 것 같다. ‘유일한 사랑’이었던 세라는 발레도 포기하고 돌아왔으나, 이제 미영이 없는 서울에서 건에게 세라는 그저 ‘친구’일 뿐이다.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다. 달팽이와 개똥이를 잃어버린 날 이후로.

예전에 건이 세라를 못 잊어 칩거하던 '자기만의 방'에는 결혼 이후에도 세라와의 동영상, 세라의 편지와 선물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미영이 ‘집’에 살고 있을 땐 그랬다. 그는 세라와의 추억을 한없이 곱씹으며 괴로워했었다. 그 장면들은 의미심장했다. 과거의 자신과 단절하고, 이후의 성장과 변모를 준비하는 일종의 ‘동굴’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 비밀의 방은 오로지 대화 상대 '개똥이'의 것이다.

아이의 침대와 장난감 등등 출산을 위해 사 두었던 것들이 그 방을 꽉 채웠다. 끝내 지켜 주지 못한 아이, 자신의 모자람으로 인해 잃게 만든 아이, 잃어버린 후에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된 그 아이의 방이다. 태어나지 못한 개똥이의 물건들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듯이 놓여 있다. 그게 이건의 지난 삼 년이었다. 지켜 주지 못한 아이와 아내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미영은 건을 생각하면, 심장에 박혀 있는 개똥이 때문에 아프다. 이 죄책감은 더 ‘멋진’ 내가 되면 덜어질까. 미영은 그 삼 년을 지키지 못한 아이를 영원히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며 견뎠는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싶다. 미국 입양아로 자란 다니엘은 어려서 잃어버린 동생과 이름이 같은 미영으로 인해 행복했다. 어쩌면 다니엘에게 미영은 ‘잃어버린 아이’의 상처를 낫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다. 미영이 아닌 누군가와 가족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모두 절박하다. 미영이 다시 파리로 돌아가기 전, 셋은 자신의 진심을 확인해야 한다. 앞으로 4회를 남겨 놓은 지금, 아무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게 됐다.

껍데기마저 잃은 ‘달팽이’들을 위하여

순정도 진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뿐, 모든 것이 언제든 상황과 여건에 맞춰 달라진다. 변화의 폭은 무제한이다. 아니 어쩌면 마음도 변한다. 점점 단단해지고 점점 진지해진다. 모든 것은 그 만남 이후 바뀌었으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바꿀 각오가 돼 있다.

다만 잊지 않았을 뿐이다. 자기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그 방향이 어디인지만 잊지 않으면 행동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보여 주는 순정의 힘이다. 디테일은 수시로 느닷없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은 변하지 않는다. 방향성이란 한 순간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어온 수많은 발자국들이 쌓여서 생겨난 길인 것이다.

모든 우연적이고 파괴적인 경험을 모조리 다 함께 겪어낸, 어쩌면 단기간에 남녀가 만나 할 수 있는 갖은 풍파와 풍상을 다 겪다시피 했던 남자와 여자가 다시 ‘같은 꿈’을 꿀 수는 있는 것일까? 다소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마치 처음인 양 다시 시작할 수는 있는 것일까? 얼마나 아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조리 다 기억에 선명한데, 그래도 다시 처음처럼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일까?

▲ 사진출처/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상처는 잊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 한 편에 안고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 상처뿐 아니라 상대방의 아픔도 보이니, 모든 게 전보다 조심스럽다. 진심이란 스스로도 감당하기 무거운 것이다. 무거운 것을 안고 있자니 비틀거리다 자칫 실수를 할 수도 있다. 그럴 땐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하면 된다. 그렇다. 두 번 세 번 한다고 해서 본질이 흐려지지는 않으니까.

기회를 얻자. 다시 사랑할 기회를. 숨죽인 채 시들어가던 진심을 되살리자. 보고 느끼자, 두 번 세 번 이 순간의 기쁨을. 살아 있는 한 로맨스에 완결이란 없다. 온 힘을 다해 채우고 이어 나갈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유일한 답은 아닐까. 사랑하라. 사랑이 운명이 될 때까지, 운명이 축복이고 기적이 될 때까지!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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