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티나리 제단화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서도 피렌체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게 되는 미술관이 있다.그곳은 단연 우피치 미술관이다. 항상 줄을 서거나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어려운 이 미술관은 그만큼 소장가치가 크고 다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오늘은 그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포티나리 제단화(도1)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포티나리 제단화가 원래 있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누오바(S. Maria Nuova)는 지금도 건재한 피렌체 소재의 병원이다.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은 폴코 포티나리(Folco Portinari)가 13세기 말에 세운 이래로 포티나리 가족의 후원을 받아왔다. 그리고 토마소 포티나리(Tommaso di Folco d'Adoardo Portinari)는 이 병원 부속 예배당 상 에디지오(San Egidio)의 제단위에 놓일 제단화를 후고 판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 c1436-83)라는 화가에게 주문하게 된다. 이 제단화의 주제는 ‘예수의 탄생’이다.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는 시점에서 제단화의 ‘탄생’ 주제와 그 그림의 숨은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1. 예수의 탄생

일반적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담은 일련의 주제들은 두 가지 주제로 요약된다. 첫째는 말 그대로 어린 아기예수의 탄생에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그리고 요셉이 등장하는 성가족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공현(公顯) 장면으로, 목동들과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이다.

예수의 탄생이 가져온 결과의 핵심은 신의 육화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하늘의 신성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곧 육화의 신비이다. 포티나리 제단화는 이런 육화의 신비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근거들을 제공한다. 황금전설에 따르면 예수 탄생의 근거들은 악을 혼동시키고, 인간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이며, 우리의 허약함을 치료하고, 우리의 자만심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포티나리에 표현된 악의 혼동은 탄생장면에서 가장 성스러운 순간, 바로 육화의 순간에 악을 함께 등장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악마 루시퍼는 중심 패널, 왼쪽 마구간의 어둠 속에 은밀히 숨어있다.(도2)

 

도판2

탄생장면에 나타나는 루시퍼(Lucifer)의 등장은 이 작품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의 그림 중에는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선한 천사들 가운데 섞여 있는 루시퍼의 출현(도3)이라든지, 보티첼리의 그림(도4)에서 사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나타난 악마들처럼 포티나리 제단화의 악마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그 묘사에 있어서도 악의(惡意)를 드러내지 않는다. 포티나리 제단화의 숨겨진 악의 이미지는 우리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어둠 속에 숨어 빛을 발하는 것으로 훨씬 상징성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도판 3

후고 판 데어 고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악마의 존재에 대한 작가의 은밀한 안내는 천사에게 비친 불길한 빛으로 예감된다. 루시퍼(Lucifer)는 ‘빛을 가져오는 자’로서 천사들 가운데 뛰어났고 많은 찬사를 받았다. 때문에 그는 교만했고 급기야 신과 같아지려고 했다. 후고 판 데르 고스는 타락천사였던 악마를 공중에 떠있는 반쯤 빛을 지닌 천사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도5) 그리하여 천사는 기둥 옆 악마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반사하는 지표가 된다. 신의 저주아래 악마의 힘들은 모든 것에 있을 수 있고 오로지 그의 빛과 대항 할 수 있는 진정한 빛은 땅바닥에 누운 아기예수에게 발산되는 빛으로 두 빛의 근원은 대조적이다. 다시말해 어둠 속 은밀한 악마의 빛과 세상에 드러나는 신성한 빛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탄생의 의미를 언급하는 또 하나의 설명은 목동들을 통해서 드러난다.(도6)

 

이  제단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가장 거칠고 낯선 집단, 그러면서도 가장 크게 묘사되어 이질적인 집단으로서의 표명이 두르러진 그룹이 바로 목동들이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마구간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경배의 장면에서 목동들의 묘사가 성모나 요셉과 동등하게 심지어 그들을 압도할 만큼 크게 묘사된 것은 그리 흔치 않다. 특히 탄생장면의 전통적인 성 그룹과 봉헌자의 수직적 종속적 관계를 상기할 때 -제단화의 봉헌자들 조차도 시각적으로 대단히 적게 묘사된 상황에서- 목동들이 중심패널에서 차지하는 규모는 이들의 의미가 적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목동들의 특성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베를린에 있는 <탄생>(도7)에서도 드러난다.

 

세속적인 인물들로서 목동들은 이 신성한 공간에 낯선 이방인으로서 호기심어린 시선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육화의 신비를 목도하고 그들의 감동을 이내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탄생 장면의 참여자가 된다. 아마도 후고 판 데르 고스가 육화의 신비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가장 여과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목동들을 지목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복장은 제단화 날개에서 보이는 인물들이나 중앙패널의 천사와 성스런 인물들과는 다르다. 봉헌자들의 고귀하고 사치스러움이 돋보이는 궁정풍의 옷과는 달리 세속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목동들의 복장과 지물(持物)들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목동들의 세부묘사와 땅바닥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신의 아들의 모습은 오히려 유대감을 느끼게 해주며 목동들의 외견(外見)은 겸손의 알레고리를 재현하는데 일조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육화의 신비를 증언하기 위한 목격자들로서 목동들을 드라마틱하게 등장시켰고 이로 인해 제단화의 영적인 깊이는 증가되고 풍부하게 되었다.

2.제단화와 성찬식

포티나리 제단화는 육화의 신비를 종교적 테마로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육화의 신비를 다시금 우리에게 재현하는, 미사의 전례로 연결시킨다.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찬의 전례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의 봉헌은 성변화의 예식으로 이어진다. 이 성찬식은 빵과 포도주가 성찬식을 통해 예수의 몸과 피로 성스러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포티나리 제단화는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는 육화의 신비와 미사에서의 성변화를 동시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근거들을 두 가지의 기호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첫째는 제단화의 중앙패널, 제일 앞쪽에 있는 밀짚단과 꽃과 꽃병들 속에서, 다른 하나는 천사들의 모습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연 후고 판 데르 고스는 우리에게 어떤 단서들을 제시함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상징들을 해독하도록 안내하는가?

첫째 이 제단화는 성서적 언급들로 가득 차 있다. 일단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은 "house of bread"를 의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요한 6:41)”라는 복음서의 언급처럼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은 빵으로, 예수의 피는 포도주로 상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경에 보이는 밀 짚단은 나란히 바닥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와 동격이다.(도8)

 

밀짚단은 미술사 속에서 후고 판 데르 고스 시대 이전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고립된 밀짚단을 통해 성찬식의 상징으로서 그 의미를 강조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티프는 베를린에 있는 후고의 작품 <Adoration of Shepherds>(도9)와 제라르 다비드에 의해 카피된 <Adoration of Magi>(도10)에서도 보인다. 후고 판 데르 고스 이후 로렌쪼 디 크레디(도11)와 기를란다요(도12)는 아기를 위해 머리 받침으로 밀 짚단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런 상징적 의미와는 좀 동떨어져 보인다.

 

도판9

다음으로 포도주와 관련한 상징은 꽃들이 꽂혀 있는 알바렐로(albarello) 꽃병과 관련된다.(도13) 알바렐로 유형의 단지는 도자기로서 15세기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만들어진 것과 일치하는 약단지였다. 다시 말해 이 단지는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허브의 저장과 운송에 사용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단지 안에 있는 꽃들은 바이올렛을 포함하여 당시 의학용으로 쓰여지던 것들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그가 마시는 잔속에 이런 꽃들을 넣어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몽포르트>(도14) 제단화와 베를린 <목동의 경배>에서 보이는 식물들은 당대 약초 본들에서 보여 지는 것들이며 그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알았던 허브과 식물들에 대한 이해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알바렐로에 그려진 포도덩굴과 포도들의 패턴장식은 상징적 표상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한 것이다.
 

도판14

사실상 중앙패널에서 탄생 장면과는 별도로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는 지표역할은 밀짚단과 꽃, 꽃병 그리고 주변에 흐트러진 꽃잎들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밀착되어 있고 실제 높은 제단 위에 하나의 시각적 봉헌물이 된 이 꽃들은 미사 전례에서 상징성을 함축하기에 족하다. 15세기 상징의 언어에서 바이올렛은 겸손과 신에 대한 순종을 상징한다. 카네이션은 “nail flower" 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 개의 카네이션의 등장은 다분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을 연상시키기며 성삼위일체의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렌지 빛 나리꽃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고 흰색과 푸른색의 아이리스는 성모의 정결과 고통을 의미한다. 삼위일체를 상기시키는 모티프는 제단화의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바닥에 흩뿌려진 20개의 꽃잎 중 세 개의 흰색 바이올렛 속에서, 더 정확한 단서들은 요셉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천사의 제의 속에서 확인된다. 제의(망토cope) 가장자리의 장식 속에 있는 얼굴들은 신의 다른 세 모습,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모습이다. 7개의 매발톱 꽃(Columbine)은 성령의 7가지 은총과 관련되며 하느님의 영(靈)은 비둘기와 자주 연결된다. 이러한 모든 단서들은 중앙패널에서 발견된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꽃들 속에 성모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흰 백합과 장미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제단화의 외부에는 성모영보(聖母領報) 장면(도13)이 그려져 있지만 여기서 성모는 흔하게 등장하는 백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작가가 성모영보의 주제에서 볼 수 있는 성모의 은총과 정결의 상징보다는 성모가 겪게 될 고통과 슬픔에 대한 언급 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대로 포티나리 제단화의 앞쪽에 있는 약제용 단지와 술잔 속에 몰약과 연고에 필적하는 치료적 식물들이 놓여진 것은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의 기적이 영적인 치유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탄에게 저당 잡힌 영혼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혹자는 크리스트교 구원은 육화를 통해서 그리고 죄와 악에 대한 구원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서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이러한 생각들은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원죄에 의한 인류의 타락은 세속으로 들어가는 병과 유한한 운명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 그 자체는 악의 표명으로 여겼다.

한편 이러한 제단화 전경의 꽃의 봉헌은 제단화의 최종 목적지인 피렌체와도 연결된다. 이것은 피렌체(플로렌스)가 “꽃의 도시(city of flower)" 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단화의 전경에 꽃을 선택한 것은 낯선 도시의 이방인들이 제단화의 상징에 쉽게 접근하도록 -피렌체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한 후고 판 데르 고스의 호의적인 배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제단화가 놓이는 곳이 상 에디지오의 놓은 제단 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꽃병에 꽂힌 꽃들의 배치는 다분히 봉헌물로서 적당한 소재이자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도판15

둘째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은 이 제단화의 모티프들이 한층 미사전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정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천사들을 통해서이다. 제단화 속에서 천사들이 입고 있는 복장들은 모두가 장엄미사(High Mass) 속에서 주례 사제, 그리고 부제와 복사들이 입고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망토(cope, vestment), 장백의(Dalmatica), 영대(alb)와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도15) 중심패널의 오른쪽 가장 눈에 뜨이는 천사는 화려하게 장식한 망토를 입고 있다. 그 가장자리에는 'Sanctus'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도16) 이는 미사전문(典文, Canon)의 첫 번째 기도인 서문경(序文經, Preface 봉헌의 최초 기도문) 속에서 하는 신성한 기도의 부분이다.

거룩하시다/거룩하시다/ 온 누리의 주 천주/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 높은 데서 호산나.

탄생의 장면에서 아기 예수는 전지전능한 신의 아들이자, 육화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게 될 희생제물이 되는 이중적 상징물이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장면에서 성스러운 아기가 왜 누드로 표현되는지를 알려준다. 즉 하느님의 신성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 누드로 표현되었으며 여기서 그 아기는 장엄미사에서 한사람의 사제이면서 희생제물이다.

성스러운 탄생 장면에 예수의 희생을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는 그뤼네발트의 <천사들의 콘서트와 탄생> 장면에도 나온다. 그뤼네발트는 성모가 안고 있는 아기예수를 너덜너덜한 흰색의 포(도17)로 감쌌다. 이는 마치 예수가 십자가위에서 허리에 둘렀던 간단한 옷(loincloth)을 연상시킨다. 또 로저 판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장면에서 벽에 십자가를 걸어 놓았던 것(도18)이나, 스테판 로흐너(Stephan Lochner)가 그의 작품 <탄생>에서 가장자리에 십자가로 수놓은 성체포(corporal)에 아기예수를 누이고 있는 장면(도19)들은 이러한 맥락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이 시각적으로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후고 판 데르 고스는 전체적인 서술의 맥락에서 은밀히 관조하도록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중앙패널(마구간)은 장엄미사를 위한 무대, 즉 제대가 되고 천사들은 미사집전을 돕는 수행원들이 된다.(제단화의 중앙 패널에는 천사들이 장엄미사의 주례 사제(Carch priest)와 하위 성직자(minor minister, subminister), 부제(副祭, Deacon)들의 제의와 복사(服事, acolyte)들의 의복들을 입고 있음으로써 간접적으로 미사전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긴 망토(cope), 알브(alb:미사용 제의 밑에 입는 흰색 옷), 알브 같은 白衣(surplice: 알브 같은 린넨 의복), 알브 위에 입는 소매 없는 옷(chasuble), 부제용 제의(Dalmatic), 사제나 부제들의 제의 위에 두르는 영대(領帶, stole)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장면 속 인물들 -날개의 봉헌자들과 더불어- 은 그림 안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능동적인 참여자이면서 그림 밖의 실제 미사의 참여자들에 의해 미사로 매번 봉헌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중의 맥락은 봉헌자인 포티나리가 제단화를 봉헌하면서 얻고자 했던 효과와 관련지어진다.
 

도판 17
도판18
이러한 추론을 입증하는 자료는 포티나리와 관련된 문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1472년 마리아 누오바(Maria Nuova)에 당시 화폐로 1년에 금화 700플로렌(florins)을 기부하였다. 이 기부에서 내건 조건은 매일 이곳에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부는 독특하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와 후고 판 데르 고스사이의 정확한 계약상의 논쟁은 문서로서 확인 할 수 없지만 미사에 대한 그의 확신과 믿음을 피력했을 것으로 충분히 여겨지는 대목이다. 결국 포티나리 제단화는 북유럽적인 전통에서 볼 때 비전을 제시하는 효과뿐 아니라 작품 자체 내에서 실제적인 미사전례를 거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포티나리 제단화는 아기 예수와 병렬적으로 밀짚단과 꽃병에 꽂힌 꽃이라는 이중의 봉헌물과 미사 봉헌의 주문자와 미사의 실제 참석자들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작품의 봉헌자였던 토마소 포티나리 개인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특히 미사 봉헌에 대한 욕구- 제단화라는 봉헌물을 통해 미사의 참석자들이 다시 한번 기적의 은총을 포티나리와 함께 간구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안내한다.
 

/최정선 200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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