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추모행렬을 바라보며

 

사진/김용길

 

돌아가다. 돌아가시다. 아마도 ‘돌아갔다’의 뜻은 원래 있던 곳, 제자리로 다시 갔다는 뜻일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사람의 죽음 앞에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쓴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돌아갔다.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다. 천주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선종’하셨다.

아, 끝없는 조문행렬

사무실이 바로 명동성당 근처인지라, 사무실 바깥을 나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왜냐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기 때문이다. 두 세시간씩 밖에 서 있다 보면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쨌든 나는 그때마다 참으로 뻘쭘할 뿐이다.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두 세시간씩 조문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고, 안 그래도 추운데 마려운 오줌은 더 마렵기 마련이어서 사무실로 들어와 화장실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큰 건물 화장실로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우리가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렇게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4일 동안 업무중지하고 화장실 안내만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야박해 보일지라도 냉정하게 ‘회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해 주세요’라고 했다.

내 영혼이 절반은 가출한 상태로 멍해 있고, 피곤했던 나는 몹쓸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올랐다. 아이고. 줄 서 있는 사람이 대략 2km는 족히 되어보였다. 세종호텔 다음 건물을 끼고 골목까지 돌았으니 말이다. 그때 시간이 대략 밤 11시. 허허허.. 나는 명동역으로 가서 카드를 찍고 플랫폼까지 내려갔다. 또 아이고.. 보이는 건 까만옷을 입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쫘악 깔려있는 것이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돌려 다시 카드를 찍고 나와서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옷에 ‘근조’핀을 꽂고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잡고 있었고, 이곳은 콜택시를 불러도 불가능해보여 을지로입구역으로 갔다. 뭐, 별반 상황이 다를 건 없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으로 콜택시를 불렀는데 정말 운 좋게 십분 뒤 탑승 성공 했다. 택시기사분께 이 택시를 타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니, 아는 택시 기사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명동에 손님이 많다고 빨리 가라고 보챈다. 뭐, 누구는 일산 화정에 있어서 못간다나 어쩐다나..

위로가 되기도 하고 실망을 안겨주시고 했던

나는 천주교 신자이다. 깊은 신앙심이 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고백성사라는 건 언제 봤는지 까마득하고, 예수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제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며(정말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이 보수적인 한국천주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할 뿐이다.

방금 뉴스를 보니 대략 20만명의 사람이 조문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어떤 면상을 들고 나타날 용기가 있었는지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씨도 왔다갔다. 죽은 사람 앞에 나타나서 인사하면, 지나간 과오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마치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역사와 화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걸까. 전 재산 29만원 전두환씨는 까만 쎄단 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당신 총머리로 죽어간 사람들 앞에도 그렇게 나타나 조문을 할 수 있겠냐, 고 텔레비전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김수환 추기경은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민주화운동의 큰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그는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실망을 더 안겨주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상세한 내용은 뭐 쓸 필욘 없겠다. 종교를 떠나 김수환 추기경은 어쨌든 큰 위안이 되어주었던 사람이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지금 이 시대.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천주교 최고 성직자가 선종했기 때문에 20만명의 사람들이 두 세시간 씩 찬바람 맞으며 서서 기다리며 조문을 하는 걸까? 천주교 신자로서 추기경이 선종했으면 당연히 조문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 때문일까? 이틀 동안 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정리한 생각은, 이 조문행렬이 단순히 한 종교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점이다. 싫든 좋든 저 사람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비단 천주교 신자들뿐만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슬퍼하고 아쉬워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나이가 들면 죽는 건 당연한 건데, 마치 자기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슬퍼하고 추모한다. 왤까. 왤까.

지금 이 시대.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최근 몇 년간의 행적이 아닌, 70-80년대에 그분에게 받은 그 위로들을 기억한다. 다시 비슷한 시대가 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그 때 그 위로를 다시금 떠올린다. 일종의 위로와 위안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억울하고 차가운 마음들을 받아줄 곳이 이젠 없는 것이다. 어디 하소연 할 데가 없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어디를 가도 1987년 그 때나 지금이나 쌩떼거리 쓰는 짓으로 치부되는 건 매한가지다.

누구에는 떼쓰는 것처럼 밖에 안 보여도 그 누구에게는 그 사람의 삶이 걸려있는 절박함, 누구에게는 문전박대해서 내보내도 괜찮겠지만, 그 누구들에게는 더 이상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절박함. 이 절박함을 받아주고 위로해주고 안아 줄 곳이 없다. 이 서러움을 풀 곳이 없다. 가슴 한 켠 쓸어내려주는 손길이 없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행렬을 보며 사람들은 단순히 김수환 추기경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한 켠 쓸어내려주는 손길, 다시 없을까

누구를 짓밟아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세상, 내가 이기지 않으면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 세상, 1987년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고 했던 그곳은 툭하면 경찰이 막아버리고, 돌아오는 건 위로의 손길이 아니라 왜 이런 성스러운 곳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느냐는 손가락질이었다. 그래,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지금 쫓겨나도 내가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그 위안,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아마도 다시 성당문은 닫힐 것이다. 다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로 해 문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하나... 어딘지도 모를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만은 택하지 않길. 그 누구도.

배여진/인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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