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성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향 사랑과 믿음의 토착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동하는 말씀 증거

2014년 8월 14일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비행기에서 내려오셨다. 교황님은 우리 교회를 대표해서 환영 인사를 전하기 위해 나온 새터민, 이주민, 장애인, 학생, 세월호 유가족 신자 등을 만나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셨다. 특히 세월호 침몰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에게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가시는 곳마다 변두리로 몰려나기 쉬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동반하는 기쁨과 충만을 일깨워 주신다.

교황님은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역시 이 과제를 직시하도록 초대하셨다.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 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황님은 주교단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예수님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한다면서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환기시키셨다. 이것은 단순히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가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고,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게 해야 한다고도 하셨다.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사도 공동체의 이상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고 청하셨다.

그런데 교황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키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하신다. 교황님은 “한국 교회가, 번영되었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 한국 교회는 특히 급격한 경제 성장과 발전 과정에 있는 사회 현실 속에서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 여정에서 끊임없이 “특별한 도전들”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권고하신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 우선하여 취하려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1,17 참조)!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한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성령을 질식시키고, 회개를 무사안일로 대체하고, 마침내 모든 선교 열정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정신적 ·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복음의 기쁨>, 93-97항 참조).”

▲ 지난 14일 한국 주교단과 만나기 위해 서울 면목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방한위원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조국애와 고향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러한 말씀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분이 이렇게 철저하게 복음살이를 요청하실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도 같다. 그분의 언행과 선포를 이해하는 데 관건을 이루는 것 중에 특히 그분의 조국애와 고향애를 주목한다. 그분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그곳에서 사제로서, 주교로서 70세가 넘도록 사셨다. 그분은 아르헨티나를 사랑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는 자기 고향의 비옥한 토양과 역사에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면서, 고향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표현하신 적도 있다(<복음의 기쁨> 235항).

우리나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조국 인식과 신앙 실천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바티칸 대사를 역임한 성염 선생이나 최근에 <교황과 나―개혁가 프란치스코와 한국>(메디치, 2014)이라는 책을 펴낸 김근수 선생, 작년 말에 교황님이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 대해서 강연한 김항섭 교수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선교하였거나 현재 선교하고 있는 많은 한국 출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선교사들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조국애와 고향애가 신앙 실천에서 갖는 의미를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은 그냥 형식적으로 조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그분은 한 대담에서 여행을 피하는 편이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 하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하셨다. “저는 ‘Casalingo’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말로 ‘가정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제가 머무는 장소를 사랑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합니다.” 외국에 머물 때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보게 되더냐는 물음에 그는 곧바로 이렇게 답하신다. “깊은 향수를 느끼게 되지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귀국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는 독일에서 박사 논문을 쓸 당시에 있었던 이런 일화를 들려주신다.

“오후가 되면 공동묘지까지 산책을 하곤 했는데, 그곳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공항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제 친구를 그곳에서 만났는데,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보고 뭘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저는 아르헨티나로 가는 비행기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교황님은 참으로 자기가 태어나서 자라도록 해준 땅,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의 복음을 살도록 존재의 바닥이 되어 준 자리를 깊이 사랑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과 고향에 대한 성찰 위에서 자신이 조국과 고향을 통해서 물려받은 가톨릭 신앙을 살아가신다. 김근수 선생은 <교황과 나>에서 교황님은 1970년대부터 1992년까지 아르헨티나가 군사독재 정권과 미국 투기자본에 휘둘려 추락을 겪은 정치와 경제의 격동기에 사제로서 장년기를 보냈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군사독재와 이에 맞선 시민의 저항이 격돌하던 기간 동안 전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인 이 나라의 양심있는 성직자들은 신학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기꺼이 감내해야 했다. 이 첨예한 대립의 한가운데에 베르골리오(교황)가 있었다. 그는 역사와 신앙 앞에 한 인간이 부서지는 것을 수없이 바라보”면서, 이 고난의 역사 시기를 “묵상을 통해” “상하지도 변절하지도 않으며” 통과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교황님은 조국이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질문하신다. 그분은 아르헨티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사람들과 이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립하면 나라와 도시와 역사가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직접 보고 체득하셨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들고 역사의 주체로 서게 하고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돌아설 것을 촉구하는 대화법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 모두가 한 조국을 위해 그리고 이 조국에 살 후세대를 위해 연대할 것을 설득해 오셨다.

얼마 전 우리는 일본 지배로부터 자유를 찾은 광복절을 맞았는데, 우리는 우리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도시, 그 고장, 그 산하, 그 삶의 바닥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고장을 우리의 가톨릭 신앙과 통합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라와 교회를 그동안 일치시켜 온 신앙인들은 나라와 교회를 떼어놓고 그 사이에 복음이 자리 잡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와 교회를 그동안 연결 짓지 못하거나 이렇게 연결 짓는 것을 거부해 온 신앙인들에게는 나라와 교회를 복음에 비추어 통합해서 바라보는 영성적 · 사목적 · 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민족적 정체성과 자기 존재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빠진 신학이나 영성이나 사목은 하느님의 살림을 그만큼 왜곡하기가 쉽다.

조국애와 고향애 위에서 이루는 항구한 토착화

실제로 나라와 고향에 대한 사랑을 영성적으로 통합하지 못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왜 그렇게 지역 교회를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존중하시는지(<복음의 기쁨> 30, 32항 참조) 알아듣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민중 신심”이라든가 “토착화”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민중 신심” 혹은 “대중 신심”을 “우리가 새로운 복음화를 추구하는 이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신학의 자리(locus theologicus)가 된다”고 말씀하신다(<복음의 기쁨> 126항; 90, 123항 등도 참조). 김근수 선생에 의하면, 교황님은 신학생으로서 자신의 신학과 사목의 방향을 설정해 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자존심과 평등 정신을 강조하는 아르헨티나식 해방신학”인 이른바 “민중 신학”을 펼친 신학자 루치오 게라와 예수회 사제인 카를로스 스칸노네 등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스칸노네 신부에게는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는데, 그를 로마에서 직접 만난 김근수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이들의 교회와 신앙에 주목하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뿌리를 내린 교황은 자신의 존재로 민중 가운데 말씀을 육화시키는 사제라고 할 수 있다.

교황님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말로 “토착화”로 번역된 inculturation을 민중과 함께 당신의 존재장에서 살아가는 분이시다. 그분은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말씀하시면서 “복음화를 토착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122항)고, 그러므로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촉진해야”(129항) 한다고 역설하신다(116항, 233 · 235항 등 참조). 교황님은 “토착화”라는 말을 <복음의 기쁨>의 한 핵심어로 설정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분이 말하는 “토착화”란 무엇인가?

“토착화”라고 번역해서 쓰고 있는 inculturation은 incarnation과 culture, 곧 “육화”와 “문화”가 결합된 말이다. 이것은 지역 문화에 하느님의 말씀과 살림이 육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자리, 구체적인 존재장에 육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교황님의 “토착화”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그분이 사신 것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생활로 육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토착화란 단순히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을 한국식으로 표현하고 적응시키는 지적 활동이나 한국 문화와 전통 종교들에 대한 존중과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란 이런 적응과 존중과 대화 차원을 모두 포용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과 섬김을 실제 자리에서 실제 관계에서 사는 것을, 그것도 혼자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사회 구조적으로 육화시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새 세대가 태어나서 자랄 때는 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저절로 내면화해 갈 수 있도록 복음을 각 인격의 온 존재장 안에, 곧 문화와 사회 구조 안에 체질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복음의 기쁨> 129항).

이런 면에서 머리로 이성으로 입으로 하는 모든 토착화는 바로 이 사랑과 섬김을 육화시키기 위한 ‘예비적’ 토착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토착화를 이런 단계에서 말해 온 측면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인 저 사랑과 섬김이라는 깊은 토착화에 통합될 때 비로소 제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수님이 가정에서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종교 · 문화 · 사회 차원에서 버려진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본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도 따돌림 당하고 짓눌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돌보는 사랑과 섬김을 육화시키는 것, 이것이 진정한 토착화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 세계가 민주화와 사회 보장 제도와 인격이 존중되는 교육 체제를 통하여 노인과 어린이와 소외 계층들의 존엄을 지켜 가는 것은 예수께서 오신 이유인 사랑과 섬김을 사회적으로 내면화해 토착화한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토착화란 선교된 지 얼마 안 되고 역사가 짧은 지역 교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교회가 토착화의 사명을 실천해 가듯이, 서구 교회는 서구 교회대로 항구하게 토착화를 지속해 갈 과제 앞에 놓여 있다. 교황님 자신이 <복음의 기쁨>에서 “특정한 장소에 구현되”는 지역 교회는 “그 지역의 얼굴을 지닌 교회”로서 “복음화의 첫째 주역”이라고 말씀하신다(30항). 그러면서 교황인 당신 자신을 “로마 주교”로 표현하시고, 자신과 교회의 중앙 조직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복음화의 현실적 요구에 더욱 충실”하게 끊임없이 개혁할 사명을 갖고 있다 하신다(32항). 교황님의 이 같은 자기 고백은 참으로 바티칸 교회를 비롯하여 모든 교회가 지역 교회로서 지속적인 토착화 사명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중남미 교회의 정통 해방신학의 경우 이곳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복음적으로 동반하는 과정에서 형성한 토착화의 한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이제 세계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교황님이 바라시는 것처럼, 성부 하느님과 스승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앞에서 주체적으로 신앙을 식별하고 그 신앙의 육화를 설계하고 실천해 갈 역량을 어떻게 건강하게 성숙시켜 갈 것인가? 이 물음에 충실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앞으로 보다 더 주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세계 신앙 공동체와 인류 공동체에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지구촌 동아시아 끝 반도에 위치한 이 나라 이 땅에 당신의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서게 하시고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민족과 함께 신앙의 전통을 이어 살도록 이끌어 주신 그 이유와 그분의 계획을.


 
황종렬 (레오)
두물머리 복음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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