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그 대화를 사실 그대로 보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고쳐 달라며 자비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엎드려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자 그 여인은 또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의 딸은 나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 전혀 자비롭지 않습니다. 자비를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비를 거절할 뿐 아니라,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자,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단어까지 사용하여 거절하십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간청합니다. 자존심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였다고 복음서가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앙은 강아지라 불리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비굴하게 엎드려 간청하는 데에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 예수님께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 림버그 형제 作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교도 여인의 딸을 고친 이야기를 마르코복음서(7,24-30)에서 옮겨 적으면서 유대인적 해석을 가미하였습니다. 유대인이 가진 자폐적 선민(選民)의식, 곧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우월감을 가미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신 분이고, 이교도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자비의 혜택을 얻어 내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모는 당연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티나로 옮겨와 정착하기 전, 그 땅의 원주민입니다.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력으로 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오늘도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팔레스티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쟁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들을 멸시하며, 그들을 강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유대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고,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예수님이 그 단어를 사용하신 것처럼 기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감한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청을 들어주어 딸을 고쳐주고 그 여인을 칭찬하지 않았다면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에 이 이야기를 굳이 싣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타민족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에 동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이방인들도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기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고,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타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은 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개방적 자세를 그들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기억을 되살려 유대인과 이교도를 차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며 신앙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구실만 있으면 사람을 차별합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 앞에 우월감을 가집니다. 유대인이 비유대인을 외면합니다. 종파(宗派)나 교파(敎派)가 다르면, 거기에는 갈등과 적의(敵意)가 있습니다. 한 정당에 몸담은 정치인들이 다른 정당 사람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상대방의 발목을 잡으려는 우리의 정치 현실입니다. 인류는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와 유(類)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배려하기보다 배타성과 적의를 더 쉽게 배설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종교가 만든 울타리 안에만 계시지도 않고, 한 교파의 담장 안에 갇혀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배타성으로 하느님을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느님은 모두에게 자비로우십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이 칭찬하셨다고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배타성과 그들이 가지는 적의에, 적의로 맞서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자비를 읽고, 그 자비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선입견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어떤 구원인지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집단을 이루면 다른 집단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산산이 찢어진 우리의 사회이고 역사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찢어짐에서 구원되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차별의 울타리들은 걷어내어야 하고, 배타성과 적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진실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배타성과 적의를 거부하는 것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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