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6일 오후 6시12분 “고맙다” 는 말 남기고..


명동대성당에 빈소 마련, 5일장으로, 장지는 용인 성직자 묘역 

강남 성모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이 2월16일 월요일 오후 6시12분 영면했다. 향년 87세.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상징처럼 살아왔던 김수환 추기경은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목자의 모범처럼, 세상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잣대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갈망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교회 신자들 뿐아니라 국민들에게도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지난해 8월29일부터 서울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해 6월11일 조촐한 생일파티가 세상에 공개된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 끊임없이 위독설이 나돌았는데 지난해 10월에는 의식 불명으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고 선종 이틀 전부터는 폐렴 증세를 보였다. 선종시에는 의식이 또렷했고 편안히 임종했다고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5일장으로 치러질 장례예식은 19일 오후 5시 입관 예절에 이어 20일 오전 10시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장례미사를 봉헌한 후 운구행렬은 천주교 용인 성직자 묘지로 이동해 안장된다.

서울대교구는 16일 밤 명동대성당에 김수환 추기경 빈소를 마련했다. 임종 후 고인의 뜻에 따라 강남 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했으며, 이후 명동대성당으로 운구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들을 맞고 있다.

서울대교구는 누구에게든 빈소 조문을 허용하지만, 질서 유지를 위해 줄을 선 순서에 맞춰 일정 인원씩 빈소에 입장하게 할 예정이다. 신자와 일반 조문객의 빈소 입장은 자정부터 중단되고 밤 사이에는 신부와 수녀들이 빈소를 지키게 된다. 고인의 평안한 안식을 기도하는 연도와 추모 미사도 매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란 사목 표어처럼 이 땅 모든 곳에 예수님의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랐던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종교지도자로, 사회의 원로로 살아왔다.  

1970년대에 민주화의 뒷심으로 작용해 온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은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돼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고, 1968년 5월 29일 대주교로 승품돼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했다.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된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47세의 나이로 최연소 추기경이 됐으며, 그 후 명실공히 한국천주교회의 좌장이 되어 ‘시대의 빛’이 되는 교회를 이끌어 왔다.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의 실현은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 표어와 같이 늘 그와 함께 했다. 교회의 사회 참여와 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기치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천주교 약진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했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가 열렸으며 미사 후 구국 선언문 선언이 있었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유신정권 퇴진 운동이 시작됐으며 교회는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정권의 대항마로 세상의 빛이 되고자 했다.

재야인사와 개신교 목사들이 주도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적극 협조한 3.1 명동 사건으로 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를 비롯 원주교구 신현봉 신부,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가 구속되고 김승훈 신부, 장덕필 신부가 불기속 기소되었다.

훗날 회고록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은 그날 기념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 박정희 대통령과의 담판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그해 3월15일에 시국 기도회가 열렸으며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교회와 나라를 위해 하느님께 매달려 구원의 빛과 은총을 간구하자고 호소했다. 사건과 관련된 신부들이 무조건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나름대로 신앙적 소신과 양심에서, 더 나아가 보다 밝고 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애국심에서 한 행동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구속된 사제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반대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단죄하여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이셨듯이 신부들도 민주화 제단에 자신을 바치고 고통을 감내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 김수환 추기경은 3.15 시국 기도회 강론에서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 죽음이다" 라고 말했다.

가난한 인생들, 어디서 위로받을까

30여년 전 그때의 강론이 작금의 교회 현실과 무엇이 다를까?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사회 정의에 깊숙이 다가간 성직자였다.

"하느님은 교회가 진실로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그들이 교회에 오는 것조차 귀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가난한 밑바닥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합니까"

1951년 사제로 서품된 후 2009년 2월 영면하기까지 나름대로 겸손한 삶을 살아왔던 추기경 김수환은  마지막 순간에 의료진과 교회 관계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으며, 각막을 기증하고 남김없이 제 자신을 소진하면서 이승을 떠났다. 

상인숙/ 지금여기 기자

<김수환 추기경 약력>


▲1922년 5월8일(음력) = 대구 출생
▲1941년 =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 상지대 입학
▲1942년 =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 진학
▲1944년 = 2차 대전으로 학업 중단하고 일제 학병으로 강제징병 
▲1947-51년 =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신학전공
▲1951년 = 사제서품 및 대구 대교구 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3년 = 대구 대주교 비서 신부
▲1955-56년 = 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6-63년 = 독일 뮌스터대 대학원 사회학전공
▲1964년 = 주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 = 마산교구 주교 서품 및 마산 교구장 착좌
▲1967년 이후 = 교황청 세계 주교 시노드(대의원회의)에 한국대표로 6차례 참석
▲1968년 = 서울 대주교 승품 및 서울 대교구장 착좌
▲1969년 =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70-75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0-73년 =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1975-98년 = 평양교구장 서리
▲1981-87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 = 서울대교구장 은퇴, 아시아 주교시노드 공동의장
▲1998-99년 = 실업극복국민운동 공동위원장, 자녀안심하고 학교보내기운동 국민재단 초대 이사장
▲2001년 =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2003년 = 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9년 2월16일 = 선종

<명예학위>
▲1974년 =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1977년 = 미국 노틀담대 명예법학박사
▲1988년 = 일본 상지대 명예신학박사
▲1990년 =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미국 시튼홀대 명예법학박사
▲1994년 = 연세대 명예신학박사
▲1995년 = 대만 푸런 가톨릭대 명예철학박사
▲1997년 = 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인문학박사
▲1999년 = 서울대 명예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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