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루카 1,39-56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마지막에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믿음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이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과 지옥, 세 층으로 된 우주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통용되던 용어입니다. 과학이 우주 공간까지 진출한 오늘, 우리는 세 층으로 된 우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믿음은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에 벌써 교회 안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믿음입니다.

신약성서는 성모님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에서 복음으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던 초기 신앙인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기 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고를 들은 마리아는 즉시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그 방문에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소식을 요한이 제일 먼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장면에는 기쁨과 찬양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쁨이고 축복이며 찬양할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서 그들의 집회에서 부르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구약 성경에서 발췌한 문장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이 그것을 채집하여 마리아가 부른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바꾼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 자비 안에서는 인간이 만든 차별, 우월감, 권세, 독선, 비굴함 등이 모두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고 행복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동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리려는 것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언급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전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의 언급 중에 역사적 사실 자체가 중요하여 보도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이 놀라서 그를 찾아 나선 이야기일 것입니다(마르 3,21-35).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놀라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마리아에 대한 복음서의 언급들은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여 보도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아들의 일에 늘 깊이 참여합니다. 이 사실 때문에 복음서들은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의 탄생 예고를 듣고,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하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에게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암시하는 마리아(요한 2,1-12)는 술이 떨어진 잔치와 같이 따분한 유대교를 보고 예수님에게 희망을 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곁에 선 당신의 모친 마리아를 당신의 제자와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어 준 이야기(요한 19,25-27)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신앙인들이 그분 제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과의 유대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모님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들은 초기 신앙인들의 처신을 알려 주는 것들입니다.

▲ 성모승천, 니콜라 푸생, 1638년作
오늘 축일은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그 모친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축일이 제정된 것은 1950년 11월 1일입니다. 1945년에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5년이 지난 때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곳곳에 아직 널려 있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일어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많은 생명이 무참하게 살상되고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모두가 철저히 실감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끼리 서로 죽이며 삶의 터전을 초토(焦土)화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선포된 땅에서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죽이며 파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독일인들이 600만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대로 훼손되었고,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 버린 삶의 현장에서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말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미워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천명해야 했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자각하게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 많은 한국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으로 타향에 끌려가 죽었고, 정신대(挺身隊)라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생긴 한국의 남북 분단은 수백만의 인구가 이산(離散) 가족이 되어 아픔을 안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이오 전쟁은 이 땅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최근에도 북한의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남한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북의 동포들은 아직도 굶주리고 강제 수용소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서나 인간의 자유는 증오와 혼란으로 쉽게 흐릅니다.

오늘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우리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 자비가 우리 실천의 기준, 우리 외침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코린 13,1)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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