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16]

1년여 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에서 기고를 요청받았을 때의 일이다. 편집국은 나에게 생활 속에서 느낀 단상들을 적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일, 일상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사연을 담담하게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칼럼란 이름으로 ‘아래로 올라가는 노래’라고 적어 보냈다. 그런데 아마 원고를 편집하는 입장에서는 그 표현이 어법에 어긋나거나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교정을 마치고 내 의향을 묻느라 돌려보낸 글에는 ‘아래로 흘러가는 노래’로 수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대로 수용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아래로 올라가는 노래’란 이름은 일본 도쿄의 가난한 노동자 주거지역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지낸 어느 목사님의 자서전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그는 무거운 짐 진 사람, 슬퍼하는 사람, 버려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교회 인식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장 바니에의 저서 <나는 예수를 만난다(I Meet Jesus)>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L'Arche, 방주)’를 설립한 장 바니에(Jean Vanier)도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예수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성공과 권력의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중요한 인물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오히려 사다리를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야 합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 함께 걷는 것이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종으로, 철저히 아래로 내려오신 예수가 바로 노숙자와 장애인들의 행렬 속에 서있는 것을 본 사람들의 고백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가기보다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려고 한다. 세상에 스스로 아래로 내려가는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잠시 움츠린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오르고 또 올라 온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기야 예수를 닮고자 하는 성직자들조차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소한의 계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구별하고 차별하여야 질서가 서고 조직이 운영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유교적 정서가 뿌리 깊은 이 나라에서는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비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권위나 관습, 심지어 미신에 의한 가르침까지 왕왕 통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니 스스로 살피고 깨닫기보다는 믿고 따르는 데 익숙한 가난하고 나약한 자들의 선의(善意)를 이용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늘 아래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장 바니에는 자신의 저서인 <나는 예수를 만난다(I Meet Jesus)>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렇게 말한다.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슬퍼하고 침울해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특히 가장 가난하고 가장 나약한 사람들과 인생을 함께하라.
나는 그들의 마음속에 숨어있으니
그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그들은 그대의 돌같이 차가운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꿔줄 것이다.
그때 그대는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나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 노래를 벗 삼아 나는 아래로 올라가리라.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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