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렵혀진 교회와 함께 해온 벗님들께

‘교황과 평신도 사이’라는 주제로 짧은 글을 써야 한다고 했더니 사무실의 한 동료가 농담조로 쥘 르나르가 쓴 세상에서 가장 짧다는 시 ‘뱀’을 글감으로 추천해 줍니다. “너무 길다”는 내용이 시의 전부인……. 교황이 존재한 이래로 이 나라에 교황이 온 것이 그동안 단 1명에, 2번 방문이 전부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위계적인 조직구조의 맨 아래 평신도에게 바티칸시국의 국가원수 교황은 너무나도 먼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마음과 진심이 통하면 물리적 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한 집에서 살 부비며 살아도 남보다 못한 관계들을 주변에서 숱하게 보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주위를 둘러보면 프란치스코 교황과 심리적 거리가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듯합니다. 심리적 거리뿐 아니라 교황을 직접 만나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을 심심찮게 접하게 됩니다. 교황을 만나러 온 사람들, 그들을 대면하는 교황의 진심어린 마음들이 전해지면서 곁에 서 있는 우리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랄까요? 낮은 곳의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에게 곁을 내주려는 교황의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멀고도 긴 교황과 평신도 사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많은 신앙인들은 권력이 된 교회, 장사꾼이 된 교회, 경직된 제도의 교회가 쇄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라는 그의 말을 받아 교황 방한이 우리 사회의 상처 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직접적인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거리에서 열렸던 미사와 기도회, 상처 받고 고통 받는 분들과의 만남 그리고 연대의 몸짓들은 <복음의 기쁨>을 우리의 현실에서 살라는 교황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7월 1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조지혜 기자

프란치스코가 등장한 지난 1년 반의 시간동안 우리는 교황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목격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변화로 체감되는 게 없으니 한껏 기대가 높아졌다는 것, 희망을 갖게 됐다는 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로 돌려보면 교황으로 인해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기대와 희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교황 한국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며칠 전 입국한 미국의 가톨릭 언론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NCR)>의 발행인이자 전(前) 편집장인 톰 폭스는 몇몇 평신도 단체와 가진 만남 이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이 한국에 와서 죽었다’는 내용의 칼럼을 올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와 나눈 대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는 한국 교회에 대해 희망보다는 위기와 불안의 징후들을 더 많이 보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 각자가 교황에 거는 기대와 희망의 크기만큼 각자의 삶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요. 이 점이 교황이, 주교가, 사제가 누구냐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사순이나, 대림 시기에 유명한 연사를 초대해 특강을 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화려한 말솜씨와 감동적인 이야기로 신자들을 웃고 울려도 강의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서면서 신앙과 무관한 일상이 돼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깨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온다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바뀔까요? 제가 경험한바 떠먹여 주는 방식으로는 백약이 무효라는 생각입니다. 1시간 강의의 약발은 1시간, 3박4일 프로그램의 약발은 딱 3박4일에서 끝나더라고요. 교황님 약발이라면 조금 더 효과가 지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약발의 세기가 아니라 약발이 내 안에서 스스로 생겨나도록 나를 준비시키고 단련시키는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길거리 본당’에서 만난 수많은 평신도 벗님들께 제안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전해 받은 울림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자가 발전할 수 있도록 뭔가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꼭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집에서, 본당에서 할 수 있는 뭔가를 말이지요. 이천리 길을 걸어간 십자가 순례 팀이 힘든 순례 여정에서 힘이 됐던 건 우연히 만났는데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주머니 쌈짓돈을 쥐어주시던 어느 아주머니, 아저씨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묵묵히 함께 걸어주신 분들의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천리 길 십자가 순례를 마치며 마련한 작은 음악회는 비 내리는 순례 길에 지쳐 있던 이들에게 힘을 주고자 했던 어느 자매님의 오카리나 연주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상처 받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마음을 내고 작지만 한 걸음 떼는 것에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과 평신도 사이는 동반자이자 길벗의 관계가 되는 게 아닐까요?

거리에서 자주 뵙는 사제,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활동가 벗님들께도 조심스레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저를 포함해 벗님들의 활동에 반응하는 이들이 대수천(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 아니라 본당을 움직이는 선한 신자들로부터 더 많이 나오길 소망합니다. 교황 방한의 영향이 조금은 있겠지만 이른바 진보적 신앙인들의 사회참여가 꾸준한 자생력을 갖기 위해선 시민사회의 반응보다 대다수 평신도들의 반응과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낮에는 직장생활에, 살림과 육아에 매여 있는 평신도들이 그들의 생활조건에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삶을 투신한 분들이 참여하는 방식과 생활인들인 평신도가 참여하는 방식이 서로 형식은 다르더라도 존중하면서 상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이 한국에 와서 죽었다’는 주제의 칼럼을 쓴다는 톰 폭스의 말에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게 아니라, 일종의 충격요법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론인 톰 폭스 나름의 교회쇄신을 위한 행동이구나 하며 공감이 갔습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와서 죽었는지 식물인간이 됐는지 모를 <복음의 기쁨>도 교황 방한이라는 처방 한 번으로 살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자가 발전하는 평신도 벗님들이 더욱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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