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연초에, 무슨 일이 있어도 3월이 되기 전까지 아주 힘든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돈이 없었다. 남들처럼 나도 불경기를 타는지 방학에 접어들며 일거리가 없어지더니 아예 돈 한 푼 들어올 기미가 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얼마 안 되는, 정말이지 얼마 안 되는 통장 잔고를 야금야금 덜어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허나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 하면 그 잔고는 바로 우리 딸내미의 등록금으로 마련되어 있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딸내미의 등록금을 야금야금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야비하고 치사한 아빠가 다시 있을까?

야비하고 치사한, 인면수심의 아빠가 아니고 싶다면 나는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려면 소위 노가다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전에 간간히 들어오던 논술 과외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상황이 되었다. 왜? 부평의 대우 자동차가 작살이 났고 나는 부평에 살고 있으므로.) 게다가 지난 여름부터 꼭 장학금을 받겠노라고 약속했던 딸내미가 기말고사 성적이 예상만큼 나오지 않자 아빠 미안하다며 울던 모습이 생생한 판에, 그 투명한 딸내미의 학자금을 내가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나를 세탁해야만 했다. 성당의 중산층화, 혹은 브루조아화를 운운하고 목울대를 젖혀 버릇하던 내가, 결국은 중산층화 되고 기름을 질질 흘리는 성당 공동체 한 구석에서 기름진 재롱을 떨고 있더라 이 말이다. 청요리 집에서 다소 비싼 요리를 시키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으며 신부님이 계신 자리면 당연히 뭔가 귀티 나는 음식이 필요하지 않나 하면서 먼저 살피게 되고, (물론 때때로 나의 이런 노예근성에 죽비를 내리치는 신부님들도 얼마든지 많이 계시다) 데모하는 쉐이 개쉐이, 이명박 최고라는 얘기를 들어도 그저 허허대고 앉아 있지를 않나, 집에 손님이 오신다고 비싼 회를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는 둥, 뭐 하나는 때깔 나는 안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하고 앉아 있더라 이 말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내가 나 스스로 별로 어색하지 않아 보이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그런 나를 주변 사람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점이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노가다를... 그것도 아주 처참할 만치 비천해 보이는 노가다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녹록하던가? 시대는 바야흐로 극한의 불경기고 그 불경기의 무시무시한 불길은 일용직과 비정규직에 먼저 내린다는 매우 자명한 사실을 나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아무 노가다 자리도 얻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딸내미의 등록금으로 남겨놓은 통장의 잔고를 목숨 걸고 아껴가며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 그런 치졸한 상황에 놓이면서, 위에서 밝혔던 두 번째 목적.. 말하자면 가당치 않은 배의 기름을 걷어내야만 하는 ‘세탁’이라는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해 가는 듯하다.

일단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술값을 낼 수 없고, 기름 값이 아까우니 조금 먼 곳에서의 호출은 일단 거절하게 되고, 마누라하고 애한테 미안해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기는 심정인데다가, TV에서 맛집 정보라도 나오면, 그 전에는 저거 어디지? 하면서 군침을 다셨으나 지금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랬다고 아예 채널을 돌려버리게 된다.

요컨대 이제껏 되잖게 나대던 나는 적잖이 주눅이 들어 겸손의 도를 되찾아가고 있으며 현찰의 고마움을 모르던 나의 두뇌는 어느덧 천원의 고귀함을 반사적으로 느끼게 되었고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돈이 없어서 담배를 끊을 뻔 했다.. 어휴..) 조금 의기소침해지는 만큼 조금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러나.....
등록금은 이제 형편없이 모자란 액수로 형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지난 주 금요일쯤이었나 보다. 마누라가 전화를 했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게 등록금 걱정을 하며 컴퓨터 오락을 하고 있었다. (정말 창피하다)

“토마스... 지연이가....”
(허걱) “왜. 등록금 낼 때 된 거야?”
“아니... 지연이가... 반에서 1등을 했대.”
“????????.....”

1등이면, 전액 장학금... 그러면... 통장의 잔고는... 이제 내 것?
나는 순간 (진짜 창피하다) 울었다. 통장의 잔고가 내 것이 된 기쁨... 그리고 나보다 나은 딸을 둔 기쁨.(나를 팔불출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은 딸내미 등록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야금야금 쓰는 입장이 돼보길 진정 바란다.)

그리고... 이내 어떤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래, 하느님이다... 이 양반. 예전부터 반쯤 죽였다가 죽을 만하면 살려주기를 항다반사로 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정말 섬뜩하다. 왜 섬뜩하냐고? 딸내미는 반에서 3등을 했단다. 1등을 한 놈은 집안 경제 사정이 너무 어려워 학교에서 원래 장학금을 주고 있었으므로 성적 장학금을 신청 안 했고, 2등을 한 놈은 갑자기 휴학을 하게 되어 마찬가지로 성적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단다.

하느님, 이제부터 정말로...로또를 사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아 믿으시라니깐요.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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