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지난 여름 내리쬐던 뜨거운 태양을 머금은 사과를 먹으며 양재천을 걸었다. 나뭇잎이 물들어 가고 한편에선 가랑잎으로 변해 떨어지는 중이었다. 봄에는 사과꽃향기를 맡으며 영주 부석사를 거닐었는데, 어느 덧 세 계절이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그동안의 태양과 바람, 부석사 북소리를 들으며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그 결과물을 내 손에 쥐어준 것이다.

맑은 가을밤, 회색과 검푸른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서편 하늘에 떠 있었다. 도시외곽으로 조금만 달리면 별들이 쏟아질 것 같이 아름다울 것이다. 천문관측 동호인들이 주로 가는 양평 언저리 덕평 쯤에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우주의 파노라마가 펼쳐질 터인데, 지금 내 머리 속은 하루의 삶을 다 소화해내지 못하고 부대끼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 사과나무에 순이 돋고 있다.(사진출처/cafe206.daum.net/_c21_)

사람을 믿고 따르는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사과와 밤하늘과 늦가을의 풍경 속에서 오랜 친구와 얼마의 돈을 두고 펼쳐지는 애증을 털어놓으며 위로를 청했다. 알고 보니, 상거래상 내 거래선을 친구가 뒷거래로 가로채고 있었다. 그 거래로 인해 얻는 소득은 많으면 오십만 원 정도.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사람이란 믿을 게 못 된다는 오랜 경구들이 떠올랐다. 사람을 믿고 따르는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시편(?)의 한 구절이 생생하게 팔딱거렸다.

가로챈 뒷거래가 드러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당황하는 친구에게 거래선을 넘겨주며 서로 도움이 되게 잘 이끌어가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 후로 그녀로부터 오는 전화를 받지 못하고, 내가 던진 멋진 말에 부대끼며 잠을 잤다. 깨어나면 친구에게 달려가 폭언을 퍼붓고 따귀라도 한 대 때리고 와야할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사람의 사랑과 우정이 돈보다 더 귀하다는 경험을 실현하고픈 생각에 빠져 내 능력을 넘어서는 귀결을 도모했지만, 마음은 순간순간 배반의 갈퀴에 할퀴어 피를 흘리고 있어 이런저런 경우를 떠올리며 나를 위로해야만 했다.

한 그루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

도꾸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정략적인 이유로 아내가 된 여자들, 정복과정에서 만난 여자, 그를 돌보아주던 궁녀들 중에서 마음이 닿아 한 생을 함께 한 여자 등등.

그 중에 이에야쓰가 가장 사랑한 여자는 오쓰우(?)라 불리던 여자였다. 오쓰우는 한 그루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였다. 그저 그 자리에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잎이 돋고 꽃을 피우는 나무, 가만히 바람에 흔들리거나 태양빛에 감응하여 푸르러가다 이윽고 주렁주렁 과일을 익혀 피곤한 이에야쓰에게 휴식과 에너지를 주는 나무, 오쓰우는 그런 나무였다. 전장(戰場)에서 살생을 총지휘하고 돌아오는 길은 승패를 떠나, 도꾸가와 이에야쓰를 피곤에 젖고 곤혹스러움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런 그를 기다리던 여자들은 그를 통하여 위로를 얻고자 하였다. 그 남자의 여인이 되어 존재감을 갖고 싶었던 이에야쓰의 여자들은 지쳐 돌아온 남자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 남자를 차지하는 게 그녀들의 전쟁의 승패였다. 정실부인을 비롯해서 모두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며 이에야쓰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냉혹한 전쟁을 벌이는 궁전 안은 그가 치루고 돌아온 전장 못지않은 혈투였다. 그 시대, 여자들의 삶의 영토는 남자의 마음이었으니까.

바람소리만을 생의 양식으로 삼는

그러나 오쓰우는 애초에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 그 마음을 잃는 여정을 모두 버리고 부석사 언저리의 한 그루 사과나무처럼, 산사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소백산맥의 바람소리만을 생의 양식으로 삼는 여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지친 심신의 이에야쓰에게는 오쓰우 같은 한 그루 사과나무가 필요했던 것인지 이에야쓰의 마음은 오쓰우만을 찾았다. 젊은 시절, 이에야쓰는 질투와 공허함에 마음이 미쳐가던 첫 번째 아내와 그 아내에게서 얻은 첫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분열된 일본을 하나로 천하통일한 영웅이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이에야쓰에게 오쓰우는 잠시 기대고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나무였다.

양재천변의 나무들이 모두 오쓰우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다. 나무와 그 나무 곁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사람-休... . 하늘과 바람과 달과 별 그리고 양재천변의 나무들과 그 아래로 흐르는 천변의 물 사이를 걸으며 사과를 먹었다. 사과를 먹으며 친구를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에게 애증을 풀어놓으며 거칠게 대응하지는 말자는 다짐을 했다. 그녀도 친구를 배반한 마음에 쓰라릴 것이다. 굳이 거친 언사와 힐난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관계의 뒤틀림 속에는 나의 무능과 어리석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민중들의 꿈이었고 한편 원망과 극복의 대상, 성직자

그런데 왜 이렇게 돈-물질 중심으로 가치관이 편성되는지 안타까웠다. 신(神) 중심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사람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의 노예로 살았던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중세를 벗어나게 만든 건 먼 저 하늘의 신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 중심의 시대에 사람들은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신의 대리자로 보이는 성직자 중심의 삶을 영위하느라 어이없게도 성직자가 우상으로 변질되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당시까지도 성직자들은 신분질서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제1신분으로 모든 기층 민중들의 꿈이었고 한편 원망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혁명 당시 성직자들은 민중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신 중심의 세계, 아니 성직자 중심의 세계가 끝나고 '인간중심'의 시대로 들어서며 사람들은 '인간'을 중심에 놓기보다 '돈-물질'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한 꼴이 아닌가 싶다. 신 중심의 시대, 사람 중심의 시대로 나뉘어질 것도 없이 어쩌면 사람 섬기는 게 하느님 섬기는 일일 텐데, 사람과 돈 사이에서 우리는 늘 저울질을 하며 사람을 위한다는 구실을 대고 '돈'을 선택하고 민중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는 잘못를 범해왔다.

흑인이라도 상관없다, 경제만 살리라는 주문

이제 하루만 지나면 미국민들의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있다. 드디어 민의가 성숙(?)해 흑인 대통령의 시대를 열 것인지, 남의 나라 일이지만 내 나라 일보다 더 관심이 간다. 만약에 이번 서브 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미국경제의 위기가 오지 않았다면, 미국민들은 공화당 후보 매케인을 제치고 오바마를 더 지지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바마를 지지하는 그들의 마음도 우리가 지난 대선에서 '경제회생'을 외치던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과 비슷하다. 그러기에 비록 오바마가 흑인이며 인권을 위해 일해온 사람이라지만 그가 어느 만큼 인권의 기치를 높일 거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이라크전쟁과 광우병 쇠고기를 거래하는 마음은 전쟁과 불공정 거래를 동원해서라도 자국의 이득을 탐하는 '돈' 중심의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였고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처지에서도 경제가 곤두박칠치자, 흑인이라도 상관없다, 경제만 살리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거 같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게 지구촌 모든 이들의 염원인가보다.

한 알의 사과를 청심환인양 먹으며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오십 만원이 친구와 나 사이에 깊은 골을 파고 있다. 용서와 화해의 말을 던졌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을 수 없도록 힘든 시간 속에서 나를 자연의 품에 던지며 한 알의 사과를 청심환인양 먹으며 하느님의 위로와 지혜를 구했다.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양재천변은 고요한 신비를 머금으며 깊어지고 있었다. 온갖 꽃과 나무들 그리고 갖가지 인간군상들이 저마다의 색채로 물들이는 곳은 어쩌면 이 초록별 지구 이외는 없는지 모른다. 나무들이 저마다의 색채로 나뭇잎을 물들이고 바람에 살랑이며 그 아래로는 냇물이 흘러가는 양재천변은 이 땅별 초록별에서나 가능한 풍경이다. 지금까지 탐험하거나 관측한 바에 의하면 어느 별도 물과 공기를 품안에 담고 지킬 수 없어 먼지로 뒤덮이거나 황폐한 사막에 불과한 곳들이었다. 멀리 있어 신비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만나서 같이 살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품는 환상처럼 말이다.

푸르스름한 초록별에 나를 낳아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얼마 전 탈렌트 A씨는 사채에 시달리다 죽었고 또 다른 탈렌트 C씨는 돈이 많아 그 돈으로 사채놀이를 한다는 소문에 시달리다 같은 운명을 자처했다. 흔히 돈이 거짓말하지 사람이 거짓말하느냐고 하는데, 사람이 거짓말하지 돈이 거짓말하는 경우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결같이, 가을이면 만추의 선물인양 사과를 보내주는 사과나무들을 생각하며 내가 한 그루의 나무로 서서 돈에 휘둘리는 친구를 맞아 그의 아픔을 달래주고, 어깨가 무거워진 연인을 생각하는 성숙한 여인이기를 하느님은 바라셨던 것 같다. 한 알의 사과만큼의 위로와 사랑을 품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사과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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