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비평 - 강은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설렙니다. 그분의 육성을 직접 듣지 않아도 교황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전 세계 신자와 민중에게 큰 가르침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기쁨을 주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 단식농성장을 철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황님이 맨얼굴의 한국을 보셨으면 하는 소원도 빌어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다니실 교황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저는 좀 엉뚱하게도 교황님을 수행할 분들의 행렬을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갑갑해짐을 느낍니다. 몇 분의 수녀님이나 여성 신자를 빼면 교황님을 주로 수행하실 신부님, 주교님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교황님이 어느 곳을 가든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입니다. 장소를 떠난 가톨릭의 특징이니까요. 이 특징은 저에게는 가톨릭의 특징이나 전통으로 다가오기보다 가톨릭의 한계, 또는 우리 교회의 아주 오래된 인습으로 느껴집니다.

전통일까 인습일까

고위직에 여성보다 남성의 비율이 여전히 높은 것은 종교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성 주도의 가부장제는 전 세계에서 아직 건재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여성의 승진에서 ‘유리천장’으로 표현되는 제약이 많을지언정 형식적으로는 여성에게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아예 여성에게 사제품을 주지 않습니다.

거꾸로 적어도 교회 안에서 높으신 분은 주님 한 분 뿐이며 그 외의 자리를 높다 낮다 하지 말고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 역할에는 남녀의 구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닐까요. 구약에 나오는 판관, 여제사장, 예언자였던 드보라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 미리암은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했고, 모세와 아론과 함께 출애굽을 이끌었던 선지자이자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 오, 드보라,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어머니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촌읍들은 죽어 있었네. (판관기 5,7)
- 아론의 누이요 여예언자인 미리암이 소구를 들고 나서자, 여자들이 모두 소구를 들고 나와 그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출애굽기 15,20-21)
-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앞장세워 종살이하던 데서 너희를 해방시켰다. (미가 6,4)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남성만 사제가 되어온 것이 특별히 폐해가 없다면 계속 이렇게 이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화는 삶에 커다랗고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가톨릭의 가부장 문화는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동등하게 서로의 존엄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필자의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광화문의 세월호 단식 농성장에서 열흘 가까이 유가족들과 동조단식을 했는데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니까 몸을 일단 유가족들이 계신 곳에 두고 함께 지내고 싶었다.” 얼이 중요한 만큼 형식도 중요하다는 체험이 담긴 말인 것 같습니다. 형식은 얼이 담기는 그릇이니까요.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고도 하지요. 내가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들이 모두 나를 만들고 이룹니다. 껍데기처럼 보이는 형식, 제도들도 문화가 되고 생활양식이 되어 나와 우리에게 스며듭니다.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가톨릭 문화는 남녀차이라기 보다는 남녀차별로서 은연중에 생활문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는 매주 월요일 변호사들이 무료법률상담을 해 오고 있습니다. 상담을 받는 분들 중에는 직장 내 성차별과 희롱, 모욕, 불이익, 그로 인한 고통을 털어 놓는 여성도 있었습 니다. 그 여성들의 ‘직장’에는 교회도 포함됩니다.

가톨릭의 남성중심 가부장문화의 폐해들

이런 성차별로 인한 갈등과 상처의 원인에 가부장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는 갈등 해결 과정에서도 난관으로 작용합니다. 중재나 법적 해결 과정을 유독 꺼리고 더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은 교회입니다. 교회다운 포용, 진실, 화해보다 교회는 대개 교회가 받을 상처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던 일꾼의 상처는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의 입장에 있는 (대부분) 남성 성직자의 권위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갈등으로 불거져 나온 안타까운 일들, 그리고 사건이 되지는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성차별적인 생각에는 교회의 제한된 성역할, 성차별 문화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문득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 행정대집행 현장에서 공권력의 그악스러운 폭력의 한복판에서 고령의 주민들을 감싸 안고 지키려고 했던 수녀님, 신부님이 떠오릅니다. 그분들의 모습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비규환의 세상이라도 기꺼이 품고 기도로 두려움을 이기고 낮은 자들의 손을 놓지 않은 진정한 수도자와 사제의 모습을 행정대집행 현장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남녀의 차이도 차별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남녀를 떠나 사람 각자에게 주신 카리스마, 소임, 개성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천주교회에서도 여성 사제, 여성 주교, 여성 교황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생경한 일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전통은 지켜가야 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돼 왔을 뿐 지킬 만한 일이 아닌 것은 인습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안에서 남녀 역할은 전통의 영역이 아니라 바꿔 가야 할 문화적 인습입니다.

고답적인 교회가 아니라 전통과 쇄신을 겸비한 교회라야
세상과 힘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개신교, 여성 목사가 있고 성공회에는 여성 사제, 나아가 여성 주교도 탄생했습니다. 여성성의 카리스마로 신자들을 이끌고 포용하는 이웃종교의 여성 지도자들을 보면 이웃종교의 문화가 참 부럽습니다. 보기 좋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누군가 가톨릭에는 왜 여성 사제가 없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거나 대답이 매우 옹색할 것 같습니다.

필자가 스무 살에 만났던 한 선배는 그때 여성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성 인권은 여러 인권 분야 중에서도 가장 ‘나중의’ 일인 것 같다고. 정확히는 많은 사람들이 여성 문제를 시급한 현안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중에 해결해도 괜찮을 거라고 여기면서 다음으로 넘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현안들에 치여서 여성 문제가 자꾸 뒤로 밀려서일까요, 아니면 뿌리 깊은 가부장 문화 때문일까요. 교회 안에서도 산적한 쇄신, 발전 과제 중 여성 사제가 가장 늦게 실현되진 않을지 우려됩니다. 공감할만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등 가톨릭이 고답적인 모습으로만 일관한다면 새 신자 영입이 점점 어려워지고 가톨릭의 위상이 흔들리는 등 세상과의 소통에 약한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고답적이기만 한 교회가 아니라 전통과 쇄신을 겸비한 교회라야 진정 세상과 힘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은주
(데보라)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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