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 거야 - 성서와 이웃종교 12

 

그리스도교는 율법과 혈연 중심의 민족 종교를 넘어섰기에 세계의 보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에 전해진 그리스도교,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대다수는 그리스도교인이라기보다는 고대 유대교인에 가깝다.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인 남성 ‘할례’(이른바 포경수술) 비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이천 오백여 년 전 확립된 유대인들의 각종 율법 규정이 확연히 다른 시간과 장소, 문화권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까지 상당 부분 문자 그대로 남아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그렇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가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게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의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여전히 반대로 알아듣는다.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 개념도 신약성서보다는 고대 유대인들의 다분히 문자주의적 시각 안에 머문다. 사실 고대에는 자연 현상을 신처럼 숭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세계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대교 본연의 사상 중 독특한 점이 있다면 신은 그 자연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 엘리트 지도자들은 자연이나 자연의 형상을 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며 경계했다.

십계명의 일부인 우상숭배 금지 조항도 그 일환이다. 다시 말해, 우상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조항(출애 20,4; 신명 5,8)은 본래 동물이나 새 등의 구체적인 형상 안에서 신을 보면서 자존자(自存者), 초월자(야훼)로서 신을 다신교적 최고신 또는 부족신(엘)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고대 이스라엘 대중의 종교적 몰이해에 대한 엘리트 사제 계급들의 신학적 경고이다. 신은 특정 형상 안에 갇히지 않는 초월자이시니 그러한 구체적인 형상이 신인 양 경배하지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는 규정도 생겨났다. 요점은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 자체를 신처럼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풀자면, 어떤 것이든 하느님보다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보다 높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중시하면서, 숭배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신약성서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거나 절하지 말라는 차원의 우상숭배 금지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음행’, ‘탐욕’ 등 ‘세상 일에 마음을 쓰는 행동’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우상숭배(偶像崇拜, 에이돌로라트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에페 5,5; 필립 3,19 참조)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에 몸을 굽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번에도 보았지만, 이른바 우상 앞에 놓인 제물을 그리스도인이 먹으면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설교했다. 요지인즉,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세상에 우상이랄 것이 뭐 있겠는가, 우상 앞에 놓인 제물은 그저 음식일 뿐,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1고린 8,4-8)

다른 신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이 더러워지는 그런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 까닭에 다른 어떤 것을 신으로 간주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절을 하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어떤 형상 앞에 절을 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을 인간적인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를 의미한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행위의 수단이나 근거로 하느님을 들먹이는 행태가 하느님을 우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행위, 곧 우상숭배인 것이다. 보통 때는 하늘에 모셔두고 무관심하다가 아쉬울 때 하느님, 예수님 하며 욕구 총족을 위해 찾는 그런 수준이라면, 하느님을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이니,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우상숭배는 멀리 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1코린 10,24)

그럼에도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은 여전히 문자주의(literalism)에 사로잡혀 있다. 대체로 우상의 속뜻보다는 고대 유대교 율법의 문자적 정의에만 얽매어 어떤 형상에 절하기만 하면 무조건 단죄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불상이 그저 ‘상’과 연결된다는 이유로 ‘우상’시하고,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이 성모상에 절하는 행위조차 비난한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낳은 분에 대한 공경의 표시인데 -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도 마리아를 하느님과 동급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전에 두루 있었던 여신 숭배 전통이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모 숭배 안에 남아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 교회사적 의미나 그 속뜻을 알려 하지 않는다. 물론 알려주는 이도 없다.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문자적 의미만 알아들으니, 허리를 굽힌다는 행위만으로 단죄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반사로 하는,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별 반성이 없다.

허리 굽혀 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자연 현상을 신처럼 간주하던 시절에 생긴 금지 규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연이 탈성화(脫聖化)되어,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한 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연은 무가치해졌다. 그로 인한 자연 파괴를 염려하고 반성하면서 자연주의나 생태학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요즘처럼 세속화한 세상에  흙이나 청동으로 만든 형상 자체를 신이라 생각하고 그것에서 복을 구하는 이가 어디 있는가?

가령 불자들이 불상에 절을 한다면, 그것은 본래 그 너머의 진리에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이다. 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보듯이, 형상 너머의 진리를 형상을 ‘통해’ 보고자 하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성모님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인이 있듯이, 불상을 불교적 진리 이상으로 생각하는 불자들로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이른바 ‘우상’을 문자 그대로 행동을 해석한 뒤 맞지 않으면 쉽게 단죄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특히 개신교에 제일 심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렇게 단죄되어서 죽은 예수를 다시 죽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예수가 옳은 분이라고 믿는다면서도 상당수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전히 예수를 단죄하는 자리에 다시 선다. 종교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례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무소부재하다고 하지 않는가? 당연히 세상 천지는 하느님이 일하시는 곳이다. 어디서든 일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해야 할 것은 포용이고 용서이고 사랑이며, 해서는 안 될 것은 정죄이다. 언제 진정한 의미의 우상숭배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질까. 하느님께서 이미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저 혼자서 속되다며 금기시 한 베드로의 잘못(사도 10장 참조)을 오늘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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