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11]

지난 3월초에 정들었던 차와 이별했다. 엔진 고장으로 막대한 수리비가 드니 폐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워낙 낡은 차이다 보니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생기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버스 타러 나가는 데만 1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나. 앞으로 발이 꽁꽁 묶이는 건 아닌가.

걱정이 많았지만 생각보다 즐거운 나들이 길이 펼쳐졌다. 산딸기나 오디, 버찌도 따 먹고, 달래 씨앗도 따고, 길 한가운데 죽어 있는 뱀을 찬찬히 관찰한 뒤에 풀섶으로 치워주기도 하고, 다람쥐 뒤를 쫓기도 하고……. 차를 타고 다닐 때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텐데, 두 발로 걷는 길에서는 풍경과 하나로 어우러져 숱한 이야깃거리를 주워 담을 수가 있었다. 역시 고생을 무릅쓸 때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

차가 없어진 것을 무척 서운해 했던 다울이도 자전거나 수레를 실컷 탈 수 있어서 좋은지 나들이 갈 때마다 연신 노래를 불렀다(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즉흥적으로 노랫말과 곡조를 만들어 부르는데, 흘러가는 냇물처럼 쏟아지는 눈처럼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다랑이는 다랑이대로 깍깍 소리를 지르며 제 기쁨을 격하게 표현했다.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었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 버스 타러 가는 길. 수레에 탄 아이들은 마냥 신났다. ⓒ정청라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새롭게 발견하게 된 기쁨이 있으니, 그건 바로 할머니들과 함께 버스를 타는 일이다. 특히 장이 서는 날이면 버스 안은 만남의 광장으로 탈바꿈을 하여 정든 풍경이 연출된다.

승강장마다 꽃송이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할머니들이 무더기로 몸을 실어 먼저 타 있던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손을 맞잡는다.

“오메, 날 더운디 잘 살았소?”
“아따메, 새 땀시 콩 못 숭군당께. 집이는 콩 다 숭궜소?”
“또 병원에 돈 보태주러 가제? 안즉도 물팍이 많이 아프요?”
“내평땍이는 집 다 지섰당가?”
“솥단지가 깨졌다고라? 밸일이네 참말로.”

이렇게 정겨운 사투리가 오고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모두 함께 어디론가 소풍을 떠나러 나온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도시에서 버스를 탈 때는 누군가와 눈만 마주쳐도 불편한 느낌인 데 반하여, 한없이 편안하기만 한 분위기! 버스가 있어서, 버스 안의 정적을 왁자지껄하게 깨뜨려 주는 할머니들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데 나처럼 좋게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한 번은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들 수다를 눈살을 찌푸리며 듣고 있다가 마침내 불만을 터뜨리셨다.

“집에서나 떠들지, 왜 버스에서 시끄럽게 해. 할망구들이 염치가 없어.”

그러자 쪽진 머리에 목소리가 우렁찬 할머니가 할아버지 쪽을 쏘아보며 곧바로 맞대응을 하셨다.

“이 할아방구야, 내 돈 내고 버스 탔는데 하고 싶은 말도 못해? 오랜만에 만나서 이 얘기 저 얘기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사람 사는 거지. 사람 소리가 듣기 싫으면 버스 타지 말고 자가용 타! 우하하하하!”

놀랍게도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시원하게 웃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다른 할머니들도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트집이라며 할아버지에게 야유의 눈빛을 보내니 할아버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괜시리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꼬리를 내리신 것이다.

‘야호, 할머니가 이겼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패를 당한 할아버지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할머니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다. 조금 왁자지껄하고 시끄럽다 하더라도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버스, 얼마나 생기 있는가. 공중도덕에 어긋날지는 몰라도 얼마나 정겨운지!

사실 공중도덕이란 것이 사람다운 맛을 가로막을 때도 있다고 본다. 모두가 남인 세상에서는 눈 안 마주치고 자기 앞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게 예의일지 모르지만, 모두가 이웃이라면 눈빛이나 웃음이 오고 가고 서로 말을 섞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와 같은 당연한 세상을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이 있어서 나는 버스 타는 일이 즐겁다. 더 늦기 전에 자가용과 이별하게 되어 퍽 다행한 일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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