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근본주의자인 르페브르회 서임 주교 4명 사면


교황청은 잊어버릴만 하면 징계중인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정당화함으로써 잠잠하던 신자들의 혼란을 일깨우곤 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에서 갈라져 나갔던 4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을 최근 철회했는데 참으로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이 일을 매우 관대한 처사로 볼 수도 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머지 양떼를 떠나는 목자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이러한 극적인 행동에 대한 감동은 길 잃은 자에게 어느 정도 겸손함이 있다고 가정된다. 어떻게든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작고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추종자들인 이 4명의 주교들에겐 그러한 모습이 없다. 사실 그들의 운동과 그 주창자들은 시종일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비난해 왔으며, 추종자들도 비오 12세 이후의 모든 교황들을 계속해서 단죄하였다.

작고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1999년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강론집을 출간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쇄신과 개방 정책에 반대하여 교회에서 분리되어 파문되었다.  그는 전통 라틴전례와 배타적 근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대주교가 서임한 네 명의 주교에 대한 파문을 최근 교황청에서 철회하였다. 

교황의 파문 철회 이후 분노의 화살은 대부분 당연히 영국의 르페브르회 주교 리차드 윌리암슨의 복권에 꽂혔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고 별난 인물로 홀로코스트를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며, 9.11 테러가 납치된 제트기가 아니라 “폭약 장치”를 이용한 것으로 보고, 유나바머(연쇄폭탄테러범)의 과학 기술에 대한 혐오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교황이 윌리암슨 주교를 다시 받아들인 사실은 즉각 가톨릭 신자들과 유다인들 사이에 의문을 일으켰다. 곧 교황이 40년 이상이나 진척된 종교간의 대화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변두리 극단주의자들과 “일치”를 도모하려하느냐이다.

소식통들은 교황의 조처를 르페브르회와 대화를 꾀하려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한 프랑스 주교는 “함께 걸어갈 길”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전체에 골고루 적용된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교황들을 단죄하지도 공의회를 완전 무시하지도 않으며, 다만 공의회의 더 깊은 의미와 내포된 뜻을 탐구하려는 이들, 나아가 공의회의 정신을 적절히 확장하기 위한 질문들을 제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처음부터 르페브르와 그의 일당들을 아주 강력하게 내치고 무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파문은 장기간의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낡은 도구이다. 권위가 떨어진 권위자들이나 사용하는 무기인 것이다.

르페브르회는 가톨릭 공동체의 아주 조그마한 집단일 뿐이다. 그들은 교회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지녔던 기억속의 희미한 시기를 열렬히 믿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일종의 근본주의자들로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신앙 분파이다. 그들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과 이야기를 가지고 미화된 과거를 숭배하는 것이다. 가톨릭 작가 유진 케네디의 말대로 그들은 남북 전쟁의 재연자들과 유사한 가톨릭 신자들이다.


화해는 칭찬할 만한 목적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화해는 정신과 마음, 영혼의 문제이며, 결국 형식적인 파문령이나 뒤이어 그것을 철회하는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다.

교황은 현대 교회의 주요한 업적을 비난하는 자들의 뒤를 살펴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보낼 사람은 보내야 한다. 미래는 다른 곳에 있다.

번역/ 김미경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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