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광명에 산다. 아이가 둘 있다.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얘기만 나와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무리 울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듯한 무력한 나날들이 90일을 넘기고 있었다.

7월 15일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 그러니까 ‘생존학생’ 75명 중에서 46명이 1박2일 도보행진을 시작했는데, 밤에 광명에서 묵어간다는 소식이 단체 카톡방에 떴다. 나는 광명YMCA 등대 생협의 촛불(조합원)인데, 아침에 아이들에게 전할 얼린 생수와 에너지바를 준비하자는 거였다. 한밤에 다시 공지가 왔다. 아이들이 행진 중에 시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생수와 간식을 받은 상태니 그냥 빈손으로 와서 아침에 격려나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단원고에서 수업을 마치고 오후 5시쯤 출발해 다음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투쟁 중인 친구의 부모님, 그러니까 ‘희생자 유가족’분들을 뵈러 간다고 했다. 아이들이 먼저 제안한 도보행진이라고 했다. 먼저 십자가를 지고 팽목항으로 떠난 두 분 아버지들과 동행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했다고 한다. 친구를 위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친구의 부모님을 위해, 아이들은 정말 세상으로 나서는 게 겁났지만 용기를 냈다고 한다.

안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동네였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너무 가까운 곳이었다. 다른 많은 촛불들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숙소인 광명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에 도착한 아이들을 길에서 기다렸다 힘껏 환영해 주었다. 새벽 2시까지 카톡방에는 새로운 공지들이 올라왔다.

▲ 16일 오전 세월호 침몰사고 생존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희생된 친구들의 부모들이 '제대로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중인 국회를 향해 이틀째 도보행진을 벌이고 있다. 학생들 뒤로 시민들이 함께 걷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햇덩이 같은 아이들을 보다

아침에 길을 나서는 아이들을 보게 되면 소리쳐 응원해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아이들이 내 앞으로 걸어오는 걸 보는 순간 목이 콱 메었다. 말은커녕 숨도 멎을 것 같았다. 너무 벅차고 너무 장한데 또 너무 안쓰러웠다. 한꺼번에 여러 감정이 왈칵 밀려왔다. 언론과 뉴스에서 죽은 것이나 진배없이 (함부로) 다뤄졌던 그 아이들이 햇덩이처럼 훤하게 살아 있었다. 이런 게 기적이구나.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아이들, 이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지금 우리에겐 기쁨이고 기적이구나. 살아준 것만도 고마운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이 뙤약볕 아래 백 리 길을 걷겠다고 한다.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첫째는 이 아이들도 희생자라는 것. 희생자 중에 사망자와 생존자가 있을 뿐,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 둘째로 사람은 비록 고난을 겪더라도(주변의 격려와 관심이 있다면) 90일쯤 지나면 햇빛 속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 살아야 하니까,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아이들이기에 가능한 생명력과 회복력일지도 모른다.

가방과 교복에 먼저 간 친구들의 명찰을 십여 개씩 달고, 거의 온몸에 친구들의 이름과 친구들에게 하는 약속의 말을 휘감고 그 아이들은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발이 붓고 더러 다리에 붕대를 감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건강했다. ‘아이들이 카메라에 트라우마가 있으니 사진 찍지 말아 달라’는 안내는 있었지만, 아이들은 앞에 있는 시민들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당당했다. 목례도 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모자를 쓰거나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4월 16일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고 행진에 동행한 부모님들이 전해주었다. 친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희망을 보았고, 세상이 자기들을 반겨주는 데서 힘을 얻었다는 얘기였다. 전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진 그 힘겹고 고된 행진을 통해 비로소 아이들은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이유, 세상 속으로 나와야 할 이유를. 어떤 참사의 생존자들이 이렇게 세상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최근 몇 년간 본 적이 없는지라 더더욱 놀라웠다. 감개무량했다.

열 개의 깃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부모님들도 걸었다. 십자가를 지고 먼저 팽목항으로 걸어간 두 아버지를 따라, 아이들이 먼저 걸어간 길을 따라, 눈물과 다짐의 길을 걸었다. 참사 100일을 앞두고 ‘세월호 유가족’들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출발해 광명을 지나 여의도를 거쳐 서울역 광장, 서울시청, 그리고 광화문으로 가는 1박2일 백 리(실제로는 51킬로미터) 도보행진을 했다. 이번에도 광명에서 묵어가셨다. 광명 실내체육관이 집에서 너무 가까워, 또 안 갈 수가 없었다. 유가족과 시민(국회의원 포함)들로 이루어진 200여 명이 넘는 행렬이었다. 종일 비를 맞으며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가며 걸은 걸음이었다.

유가족들은 길에서 환영 인파를 만나면, 마주 인사하고 고마워하시다 끝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곤 한다. 눈물은 아무리 흘려도 넘치고 또 넘쳐서 보는 이까지 울먹이게 한다. 이분들이 체육관에 여장을 푼 다음에야 나는 알았다. 그 발과 손, 허리……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는 지친 단체 티셔츠의 사람들이 그 빗속을 걸어온 것이었다. 밖에서는 몰랐는데, 잘 걷지 못할 정도로 절룩이는 분도 보였다. 체육관은 삽시간에 강력한 파스 냄새로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일제히 파스를 붙였을 때의 어지러움이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건데 미처 상상을 못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파스와 침, 얼음찜질 등에 의지해 걷고 있는 부모들. 보낸 자식 생각에 긴장을 놓지도 못하는 그 미어지는 심정이 파스 냄새에 묻어나는 듯했다. 그런데도 좀 더 편안한 다른 숙소를 마다하고 체육관으로 숙소를 정했다고 한다. 서로 같이 있기 위해서.

행진 참가자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앉았을 때, 제일 눈에 띈 것은 맨 앞의 깃발이었다. 열 개의 노란 깃발. 1반, 2반, 3반, 4반, 5반, 6반, 7반, 8반, 9반 그리고 10반. 그 노란색 깃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깃발 뒤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리 배치가 어떤 뜻인지를 깨닫는 순간 눈을 쏘인 기분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아, 열 개의 노란 깃발! 아이가 몇 학년 때 몇 반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부모들은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 것인가! 그 당연한 망각을, 단원고 2학년 부모들은 평생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이대로 영원히 2학년 ○반 ○○번으로 멎어 있을 것이다. 부모는 아이의 얼굴 사진이 담긴 학생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유가족이 맞으니 믿어 달라는 일종의 신분 증명을 달아야 했던 그들의 이중고. 노란 깃발과 아이의 학생증 목걸이. 목이 멨다. 저 너무도 선명한 기억에서, 저 영원할지 모르는 낙인에서 이 부모들을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우리가 그걸 할 수는 있는 걸까.

그 부모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의 이름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흔적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떼로 사라져버린 아이들. 이제 부모가 부여잡을 건 그 아이들의 이름뿐이다. 그거 하나 남은 걸, 그 서러운 이름들의 명예라도 지켜달라는 건데, 그게 권력을 거스르고 법을 흔드는 일이라면서 비방하고 폄훼하는 목소리가 국회에서 연일 흘러나왔다. 심지어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특별법을 반대하는 비방 카톡을 퍼 나르다 걸렸다(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대한변호사협회가 검토하고 만든 ‘정당한’ 법안인데도, 논의는커녕 트집으로 세월만 보내고 있다(이에 항의하며 24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4.16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변호사 1043인 선언’이 있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그저 진상규명이다. 왜 아이들이 죽었는지? 왜 사고발생시 바로 구조하지 않음으로써 참사를 키운 것인지? ‘보상비’와 ‘특례 입학’등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그걸 이용해 유가족을 비방하고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간 쪽은 새누리당이다.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은 처음부터 ‘진상규명’만을 원했다. 유가족은 지금 집권여당에 ‘보상비’와 ‘특례 입학’ 조항을 빼달라고 강력하게 요구 중이다. 유가족의 뜻을 언론은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지도 않다.

‘제대로 된 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만일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법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면, 억울한 피해는 수없이 반복될 것이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연히 취해져야 할 조치들이 현재로서는 미비하기에,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제라도 제대로 정해야 한다.

▲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유가족들 ⓒ정현진 기자

함께 있는 우리를 보다

7월 24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빽빽한 사람의 숲이었다. 이틀간 그렇게 퍼붓던 빗줄기가 완전히 갠 것만 같았다. 믿어지지 않을 청명함이었다. 100일 추모 공연 ‘네 눈물을 기억하라’가 진행되는 세 시간여 동안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을 뿐이다. 비는 마지막 순서 ‘내 영혼 바람되어’ 합창곡이 흘러나올 때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이 공연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준 것만 같았다.

원래는 공연 후 광화문까지 행진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미리 신고도 마친 정당한 행진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퍼붓는 폭우 속에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기다렸지만, 경찰 차벽으로 막힌 도로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1박2일을 꼬박 걸은 유가족들과 광화문에서 잠시 건너오신 11일째 단식 중인 유가족들이 그 자리에서 비를 맞았다. 쓰러질 듯한 몸으로 새벽 3시까지 비를 맞았다고 한다. 11시 반쯤 돌아서면서, 막차를 걱정하고 내일의 일과를 걱정하는 나의 나약함과 허탈감에 눈물이 났다. 빗속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모아 외쳤지만, 우리는 약 10미터쯤을 더 나간 곳에서 멈춰야 했다. 그날은.

그 모진 시간들이 흘러 흘러 백일이 되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백나흘째를 맞이한 지금도 여전히 잊지 않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서 몇 걸음쯤이나 온 것일까. 희생자들의 명예를 위하여, 살아남은 사람들과 가족들의 삶을 위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하여 아직 할 일이 많다. 다음 백일에도 그 다음 백일에도 잊지 않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우리의 다음 걸음을 위하여 그 다음 백 리 길을 위하여 오늘은 여기까지만 울겠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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