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에 대한 공경은 교회에서 오래된 전통이고 신앙이기도 하다. 교회가 성모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은 신학을 통해서 또는 성인들의 체험과 기적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모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이미지의 형태로, 예컨대 시각적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마리아의 등장은 성모영보, 엘리사벳과의 만남, 예수 탄생, 이집트로의 피난, 성전에서 찾은 예수, 예수의 봉헌,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십자가처형 장면, 성령강림, 성모승천, 대관식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과거 작품들은 우리에게 작품이 제작된 시대와 공간적인 배경, 신학적인 논리와 교회의 입장들을 알려주는 자료로도 이용된다. 그래서 작품을 제작한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그것을 주문한 주문자가 누구인가, 또 어떤 의도로 주문했는가가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자체가 시대를 초월하여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는 시각적 메시지와 그 효용은 역시 직접적인 이미지다.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 온 마리아의 이미지도 이런 점에서 살펴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늘의 여왕, 중재자 마리아, 신의 어머니 등등 그녀를 따라다는 여러 수식어들 중에서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은 어머니이다. 그녀는 때로는 표정에서, 때로는 행동 속에서 그녀는 예수 때문에 기쁘고 슬프다.

마리아를 대신하는 당대의 모델들은 실제의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 속에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속에서, 또 자신의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마리아를 짐작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 그녀는 행복한 순간과 고통 속에서 예수를 반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미지는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교리와 사람들의 정서적이고 실제적인 숭배행위 사이에서 일종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존재해 왔다. 오늘 소개할 그림들은 그러한 마리아의 이미지 중에서도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 즉 거창한 교리와 신학이 아니어도 마리아가 인간이었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는 그림들을 소개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잉태사실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이다. 대부분의 그림들 속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이 그림들에서 마리아는 놀라움의 제스추어(그림1)를 보이고 있고 그녀의 행동에는 두려움마저 보인다.(그림2). 처녀에게 잉태의 사실은 사뭇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이었을 이다.

 

 

두 번째 임신한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포르티나리 삼면 제단화> 왼쪽 후경에는 나귀에서 내려 요셉의 부축으로 어렵사리 비탈길을 걸어가는 성모를 볼 수 있다.(그림) 만삭의 산모에게는 쉽지 않은 행보였으리라. 15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성모의 인간적인 어려움은 충분한 공감을 일으켰을 것이다.
 

세 번째 그림은 마리아가 임신한 여인들의 안전한 출산을 기원하는 코드로 작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장면은 ‘출산의 성모(Madonna del Parto)’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그림4) 임신한 성모의 아이콘적 제시는 임신 중의 여인들에게 숭배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출산 후 어머니와 아이의 긴밀한 인간적 유대관계는 수유에서 드러난다.(그림5) 이것은 교회와 마리아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예로도 작용했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달래고 젖먹이고 안고 있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는데 가장 적절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면에서 마리아는 흐뭇한 모습으로 아이와 볼을 맞대거나 은은한 시선으로 눈을 맞춘다.(그림6)

 


 

사진5


네 번째는 마리아의 고통이다. 이는 성모 칠고(七苦)와 관련된 것으로 가장 절정은 예수의 죽음에서 엿볼 수 있다. 골고타에서 마리아의 고통은 예수에 대한 연민(compassio)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극도의 슬픔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혼절한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목도한 그녀는 시신이 되어 늘어진 아들의 팔과 병치된다. (그림7, 세부도 그림 8)

 

 

미술사에서 마리아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이미지는 교회가 채택한 마리아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명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고통에 동참한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대중적인 공감대에 놓일만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마리아는 시신이 된 아들을 안게 된다. 일명 ‘피에타’로 알려진 단독상이 그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절정에 달한 고통의 미학이 고즈넉한 명상거리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인 그림 읽기는 어려워진다. 왜냐면 너무나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그림9)는 서른이 넘은 아들을 안고 있는 마리아가 예수와 별 나이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애 띤 얼굴로, 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이다. 이제 마리아의 고통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듯하다. 이러한 마리아의 표정과 자세는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마리아)와 아기의 단독 상에서도 표현된다. 예정된 아기의 운명은 어머니와 아이에게 행복감이나 따뜻함을 상기시키지 못한다.(그림10) 그래서 우리는 이 모자에게 미래의 피에타를 본다.
 

마리아의 이미지가 공식적인 단체나 교회 그리고 개인적 주문과 후원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공통분모는 그녀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세상의 진리 중 하나는 어머니와 아이의 혈연적인 친밀감과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나타난다. 그러기에 마리아 그림의 감동은 예수라는 존재와 만나게 될 때 더욱 고무된다.

교회에서 인간적인 마리아를 기억하고 담으려는 노력들은 고통을 숙연히 받아들인 어머니를 통해 신자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리아에 대한 묵상이전에 그녀의 행위와 삶에 대한 공감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마리아가 보는 이의 어머니로 느껴지게 이미지화 하는 것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현실이 되기 위함이다.

이글에서 살펴본 그림들은 대관식의 성모나 옥좌에 앉은 마리아보다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누군가의 어머니와 어떤 어머니의 아들, 딸들이 다양한 이미지로 남은 예수의 어머니 바라보기를 시도하고 있다.

/최정선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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