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폭스와 신학자, 수도자, 활동가들의 일문일답

지난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생태영성 간담회에 참석한 매튜 폭스 신부(성공회)는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각 종단 신학자들과 수도자, 생태환경 활동가 20여 명과 함께 생태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질의응답으로 진행된 내용을 요약해 전한다. ―편집자

▲ 매튜 폭스 신부는 이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질문에 “깊은 애도가 필요하다”면서 “애도를 제대로 해야만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떤 종교가 됐든 상처받은 영혼들을 깊은 애도로 이끌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상봉 기자

―한국의 세월호 참사는 무엇보다 반영성적 사건이다. 영성가나 신비가들은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며, 시대의 징표를 읽고 비판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라고 읽었다. 우리가 영성가, 예언자라면 지금의 현실에서 어떤 실천을 하고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매튜 폭스 : 끔직한 사건으로 인한 희생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지 살피게 된다. 이 주제를 놓고 명상한 내용은 세월호 참사가 바로 ‘어른들의 죄’라는 것이다.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 문제는 우리 미래 세대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어떤 다양성을 보존할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다.

이 재앙에 대해 먼저 떠오른 것은 여러분이 애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애도를 많이 해야 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 애도할 것이 너무 많다. 애도는 울부짖음, 외침, 통증 등 신체적으로도 일어나야 하고,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공동체 안에서 창조성이 가로막혀 분노만 표출하게 된다.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은 단지 한 층위의 문제다. 더 깊이 심장을 건드리지 못한다. 애도를 제대로 하면 가슴을 열어주고, 영혼의 깊은 상처를 막아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종교에 던지고 싶은 도전은 어떤 종교가 됐든 말로써가 아닌 실제의 깊은 애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라는 것이다.

애도의 예식이 이뤄지면 사람들은 깊이 응답한다. 애도에 목마르기 때문이고 슬픔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슬픔이 발현되지 못하면 창조적일 수 없다.

―우리 인류의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는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영적 차원이라는 말씀에 동의한다. 그러나 도심에서 메마르고 시장경제 중심의 삶을 사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생태적 · 영적으로 이끄는가가 문제로 다가온다.

젊은이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세대는 문제의 여지를 많이 물려받았다. 젊은이들을 만나본 결과, 그들 대부분은 도대체 어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골프장이나 주식시장에 있는 나이 많은 세대가 젊은이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한다.

도시의 젊은이들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 야생, 가장 원초적인 상황에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라. 아담 파코의 시도에서 보이듯, 도시의 젊은이들을 사원에서 3~4일 간 피정하도록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깨달음을 얻고 신비가의 경험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 미국에서는 또 젊은이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다. 취업이 힘든 상황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의 가치에 부합되는 일을 찾아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이것은 언론에는 노출되지 않지만 급진적인 현상이다. 그런 공동체를 통해 여유와 우정이 중요해지고, 명상과 공부, 정치적 조직화 등을 통해 가치관을 전복시킨다. 이들은 자본주의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며, 함께 일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가치를 회복시키고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해결책은 교육의 창의성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교육은 교실에서 창의성을 모두 상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배움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교육 체계는 창의성을 빼면 가부장적 구조다. 교육 시스템 안으로 여성성을 들여오는 것이 창의성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 지난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생태영성 간담회에 참석한 매튜 폭스 신부가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각 종단 신학자들과 수도자, 생태환경 활동가 20여 명과 함께 생태영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상봉 기자

―생태영성을 말하는 이들이 과학적인 현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특히 기후 문제, 지구온난화 그로 인한 사막화와 농업 붕괴와 같은 긴박한 현실 앞에서 생태영성이 긴박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생태영성이 늘 영적 전통에만 초점을 맞출 뿐,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이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생태영성이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그야말로 재앙이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사실에 근거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이미 지구온난화의 폐해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과학자들이 조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과학자는 45억년 지구 역사상 멸망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첫 번째 종이 인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그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 생태적인 재앙은 우리 자체를 깨어나게 할 만한 문제지만, 정치, 산업, 종교 그 모든 분야를 바꿔야 이 공동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영성적으로 언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 즉 영적 용기, 전사다움, 어머니 지구를 지키려는 사람들아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삶을 재창조하는 폭발적 창의력이 필요하다.

창의성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선물이다. 과학적 사실도 다뤄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해 창조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긴박함은 또 다르게 희망이 되기도 한다. 움직일 때가 됐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강인함과 용기가 있다. 우리 처지를 한탄만 하지 말고 그것을 불러내야 한다. 가부장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자기 연민이 있다. 가부장제가 내면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밖에서 무언가를 찾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연민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조직화와 내 안의 힘을 기르는 데 남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성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이 생태영성을 이야기할 때 기술, 산업과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대비가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인간의 조건은 영적 차원과 물적 차원이 함께 가는 것인데, 우리 삶에서 시장,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탐욕, 양극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태영성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 있는 기여를 하려면, 상업, 시장, 경제, 기술이 이미 갖고 있는 영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산업이 창의적으로 환경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산업은 책임과 동시에 가능성도 갖고 있으며,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에 내재된 것 중 하나가 탐욕, 인간 중심주의다. 월스트리트 구조는 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있다. 6년 전 월스트리트 시위, 교황님이 “야만의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쓴 것에 동의한다.

새롭게 제시되는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이 모두를 위해 일하는’ 자본주의다. 모두를 위한 경제를 말할 때는 바다, 짐승, 숲, 미래세대를 포함하는 것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다양한 층위에서 작용하는 창의성이다.

산업경제는 매우 중요하고, 우리의 깊은 창조성이 필요한 분야다. 각 종교들이 각자의 틀 안에만 머물 수 없는 것처럼, 경제적 상상력도 월스트리트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