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10]

한낮의 더위가 무르익는 시간,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 창고 담벼락이 드리운 그늘 자리로 모여든다. 이 자리의 단골손님인 끝집 아저씨는 날마다 다울이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며 시간을 보내신다.

“다굴아, 오늘 핵교에서 뭐 배왔어?”
“안 배웠어요.”
“암것도 안 배왔어? 아…. 그럼 점심 때 뭐 먹었어? 괴기 먹었어? 괴기 많이 묵어야 되야. 괴기 없으면 아자씨가 잡아다 줄텡께 먹고 싶으면 말해라이. 멧돼지가 좋으냐, 고라니가 좋으냐? 배암탕도 한번 묵어 볼래?”
“안 먹을래요. 징그러워요.”
“푹 고아서 건데기는 없어. 그기 을매나 좋은디 그려. 아자씨처럼 힘 쎄지고 싶으면 배암탕도 묵어야 되야.”
“윽…. 싫어요.”
“그럼 달걀은 어떠냐? 우리 집 닭들이 달걀을 하루에도 몇 개씩 낳는디, 그거 꺼내기가 귀찮아서 못 먹는당께. 안 꺼내고 며칠 있으믄 닭들이 알을 다 쪼아블어.”
“나는 달걀은 좋아하는데요.”
“그라면 가자. 아자씨가 꺼내 줄랑께.”

마침내 다울이와 끝집 아저씨는 함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있으니 다울이가 달걀 여러 알이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달려왔다. “엄마, 나 달걀 삶아줘~!”하면서 말이다. 만약 다울이가 뱀탕이 먹고 싶다고 했으면 뱀탕을 한 그릇 들려 보내셨을까?

끝집 아저씨와 명랑 할머니

솔직히 나는 이사 와서 아주 오랫동안 끝집 아저씨에게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술을 먹고 마을을 소란스럽게 하신 일도 여러 번 있고, 뱀이나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며 몸 보신탕을 끓여 드시기도 하는 게 영 못마땅해서다. 하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아저씨의 따듯한 마음과 아이처럼 개구지고 천진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저씨의 어머니, 그러니까 명랑 할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명랑 할머니는 내가 이 마을로 이사 오기 서너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끝집 아저씨 때문에 애간장을 많이 태워서라는데,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대화 속에서 명랑 할머니를 추억하고는 한다.

“명랑땍이가 팥죽을 맛나게 쒔는디 말이여.”
“그라제. 명랑땍이 불러서 가보믄 ‘한평땍, 한평 양반 갖다 줘.’ 함서 큰 그릇으로 한 그릇 떠 주고 그랬당께. 그거 갖다 주믄 우리 집 남자도 오지게 잘 먹었는디.”
“청포묵도 잘 쒔쟎여. 제사 때마다 쒀서 올리고 그랬제. 사람들 다 노놔 주고 말이여.”
“참말로, 명랑땍이 있을 때는 참 재미났는디….”

가만히 들어보면 명랑 할머니는 정이 많고 따듯한 분이었던 것 같다. 끝집 아저씨처럼 입담도 좋아서 모여서 먹고 놀고 웃고 하는 자리를 부지런히 만드셨다고 한다. 비 오고 꿉꿉한 날이면 밀가루로 국수 밀어서 큰 솥으로 한 가득 팥죽을 쑤고, 제사 음식도 다 나눠 먹고, 장에 나가면 뭐라도 맛난 것을 사 와서 사람들 불러다 먹이고…. 겨울이면 명랑 할머니 안방이 마을회관이나 다름없었을 정도였다는데 그 시절 왁자지껄한 마을 풍경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한편, 수봉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명랑 할머니는 아무도 못 말리는 푼수이기도 했다. 한 예로 당장 용돈이 모자라면 아무에게나 헐값에 땅을 파셨단다. 택시 타고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택시 기사한테도 땅을 팔고, 말을 슬쩍 던져 봐서 산다는 사람 있으면 땡처리 물건 팔듯이 파셨단다.

그 얘길 듣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시골 사람들에게 땅이란 자기 몸뚱이 같은 것인데, 그걸 그렇게 큰 고민 없이 파시다니 말이다. 명랑 할머니는 남들이 뭐라 하건 오늘 하루 잘 먹고 잘 놀면서 사는 걸 가장 가치 있게 여기셨던 분이었던가 보다. 이리저리 계산하지 않고 제 눈에 가장 좋아 보이는 무언가를 선뜻 선택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런 재미난 캐릭터의 할머니를 살아생전에 만나 뵙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명랑 할머니가 살던 시절의 마을 풍경-아낌없이 나누고, 너나없이 어우러졌던 지난 날-이 간절하게 그립다. 마을에 명랑 할머니 같은 사람이 한 분만 있어도 마을이 환해지고, 사람 사는 맛이 제대로 났을 텐데…. 그런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하면 누구나 ‘나만 먹을 거야! 내 가족이 전부야!’ 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바라보게 되지 않겠나.

▲ 마을 사람들에게 돌린 산딸기 찜케이크. 산딸기 덕분에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정청라

명랑 할머니를 떠올리며 산딸기 케이크 대작전

그래서 말이다, 나도 명랑 할머니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흉내를 내볼까 하고 일을 계획했다. 이름 하여 산딸기 케이크 대작전! 마침 올해 거둔 밀로 밀가루를 냈는데, 이걸 좀 나누어 먹고 싶던 차에 눈부시게 빛나는 산딸기와 끝집 아저씨표 달걀을 보니 산딸기 케이크가 떠올랐다. 그래서 해 뜨자마자 부지런을 떨어 다울이 다랑이와 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오고, 달걀과 밀가루, 콩비지 등을 이용하여 찜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목련잎에 나누어 담아 케이크 배달을 다녔다.

“할머니, 이것 좀 맛보세요.”
“이게 뭐시여? 아따, 맛있겄네. 잘 먹겄소.”

사실 나누러 다니는 게 쑥스럽기도 했지만, 케이크를 받아드는 할머니들 얼굴이 환해지시는 걸 보니 뿌듯했다. 명랑 할머니처럼 손 크게 무엇인가를 나눌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씩 한 발자국이라도 나누는 길을 가고 싶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 그리워만 하지 말고 작은 빗방울만큼 씩이라도 이루어 가야지.

아직도 남아 있는 명랑 할머니 온기가 내 안을 덥히며 불을 지핀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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