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사랑]

  

 

도시 중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어 모든 것이 새롭던 꿈 많은 소년시절, 막스 밀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읽으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되어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에 아련하다.

“당신은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나요?”
“왜냐고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너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들판에 핀 꽃더러 왜 피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우리 머리에 떠오른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이유가 다 따로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방식 또한 다 다르겠지만, 독일인의 사랑이나 한국인의 사랑이나 지고지순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에 사는 한국교포 부부의 얘기다. 가톨릭 신자인 아내는 성당에 갈 때마다 비신자인 남편이 드러내 놓고 못마땅해하는 눈치를 늘 감수해야 했다. 미국에서 살다 보면 아무리 보수적인 남자라고 해도 웬만큼은 가사노동을 분담해 주는데, 성당에 갈 경우 남편은 일체 도와주지 않았다. 그날도 성당에서 평일미사를 보고 레지오 회합을 한 후, 다가올 행사 때문에 의논을 하다 보니 밤 12시를 또 넘겨버렸다. 조바심을 내며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집 안 꼴을 상상하니 악몽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이며 설거지통에 잔뜩 쌓아둔 그릇들, 그리고 아직 걷지도 개지도 않은 채 널려있을 빨래를 생각하니 머릿골이 지끈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남편이 얌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며, 집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빨래도 곱게 개켜져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에 가까운 비명이 나왔다.

오 마이 갓!(Oh my God! 세상에, 맙소사, 어머나, 저런 등의 영어식 표현)
그러자 남편이 가까이 다가와서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둘만 있을 때는 그냥 「자기」라고 불러.”

동양인에 비해, 아니 한국 사람과 비교해서 서양인들은 내면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우리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언어적 사랑표현을 그야말로 목마를 때 물을 마시듯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의 관계를 끝내는 것 또한 매우 쉽고 간단한 표현으로 처리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런 언어적 표현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게 쉽게 헤어져 버린 연인들이 오랫동안 서로를 못 잊어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후회하는 것을,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이런 쉽고 간결한 방식의 이별을 감당해 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표현을 잘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부부들 중에 표현을 잘 못해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든가, 잘 표현하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북쪽보다는 남쪽으로 갈수록 그렇고, 전라도보다 경상도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더 심하다고 한다. ME주말부부 피정 중에 서로에게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내에 비해 상대적으로 쑥스러워하는 남편들에게 그냥 눈 딱 감고 ‘여보.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하면서 껴안아 주라고 시켰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분위기에 싸여 약간은 어색하게라도 다들 하고 지나가는데, 경상도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내는 쌔리 쥑인다케도 그 말만은 몬한데이.”

퇴근 후 일상적인 대화를 ‘밥 뭇나? 아는? 고마 자자’ 딱 세 마디로 해결하며, 전화가 와도 ‘알았다. 됐다. 끊자’ 로 일관하기에, 휴대폰 3사의 마케팅 리서치에서 1회당 통화시간이 전국에서 가장 짧게 조사된 곳이 경상남도다. 그런데도 ‘사랑해’라는 말만은 그토록 길게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잘 표현하여 은근히 행복했던 다른 지방 출신 아내가 쉬는 시간에 경상도 아내에게 다가갔다.

“참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 말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그렇게 모진 말을 하지요?”
“뭐가예? 지 남편 말씀이라예? 그기 사실은 내를 억수로 사랑한다카는 기라예.”


내가 실제로 겪은 사례도 있다. <프라도 사제회>의 관심자 시절, 아버지 신부의 권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다는 성소에 맞추어 구미공단 지역에 얼마간 살았었다. 내가 머무르고 있던 성당의 주임신부와 함께 신자 댁을 방문했는데, 아내께서 커피를 내오셨다. 그런데 남편께서 커피를 마시지도 않은 채 커피 잔을 들고서 주방 쪽에다 소리쳤다.

“이기 뭐꼬? 보리 숭늉물이가 양말 빤 물이가? 이걸 커피라꼬 타 왔나? 어이?”
아내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데 공연히 민망해서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커피를 내가 보기에는 맛있게 잘 마셨다. 커피 잔을 챙겨들고 주방 쪽으로 가서 과일을 깎고 계시는 아내 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었다.
“참 가슴 아프시겠어요. 아니,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함께 사시기가 무척 힘드시겠어요.”
“아닌데예. 그기 커피가 참 맛있다카는 말이라예.”

오 마이 갓!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어떻게 말하는가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아듣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때려 죽인다 해도 그 말만은 못하겠다’라고 말해도 그걸 ‘사랑 한다’라고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고, ‘양말 빤 물’이라고 말해도 ‘맛있어 보인다’라고 알아들으면 되지 않는가? 언어 표현을 잘하는 어떤 서양인도 이토록 잘 알아듣지는 못할 것 같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우리에게 한국 시의 감칠맛을 한껏 맛보게 해준 청록파 시인 박목월 선생께서 아내를 두고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집을 떠나 멀리 산골에서 지내는 남편을 어렵게 찾아간 아내는,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집 툇마루에 가져간 보따리만 놓고 조용히 돌아왔다. 남편의 속옷가지와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나중에 보따리를 풀어본 시인은 그토록 착한 아내를 버릴 수 없다고 애인에게 말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시가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는 노랫말로 널리 알려진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김성태 곡)>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소통인가. 가슴에 담긴 것을 말로 다 표현하지 않고도, 일상에 깃든 다양한 요소를 잘 활용하여 얼마든지 이루어내는 쌍방소통. 한국인의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좋을 수도 없고 다 나쁠 수도 없다. 서양인은 잘 표현하는 반면 동양인은 잘 알아듣고 잘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어 표현이 박한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을 닮아 좀 더 잘 표현하면 좋겠고, 서양 사람들은 표현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가슴에 간직된 사랑과 진실이 더욱 소중할 수도 있는 동양 사람들을 닮아갈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굳이 말로 다하지 않아도 좋은 사랑을 노래한 나태주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이 내게 있어도

차마 모진 말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남에게 모진 말 들으면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맘 내게 있어도

차마 그 말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듣고 있을 때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졌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나태주 시 / 김정식 곡「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전문)

 

 

 

사진 고태환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그리고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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