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밀과 가라지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밀 사이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는 말로써 가라지는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밀을 풍요롭게 수확하는 데에 피해를 주는 가라지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추수 때에 뽑혀 불에 던져질 가라지의 운명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선하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옛날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낮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집안에는 높은 사람, 곧 가장이 있었습니다. 가장은 가솔(家率)들 위에 군림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의 가장은 가솔들을 죽이고 살릴 권한까지 가졌었습니다. 나라에는 왕이 있었고, 왕이 임명한 관리들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그들이 만든 법을 지켜야 하였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낮은 백성은 높은 사람들의 통촉하심을 입어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들보다 더 높은 존재였습니다. 가뭄, 홍수, 태풍, 지진 등, 천재지변은 모두 하느님이 노하셔서 주는 벌이라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며, 하느님이 노여움을 풀도록 기도하여, 백성이 그 혜택으로 잘 살 수 있도록 빌었습니다. 우리나라 강화도 마니산에도 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습니다. 중국의 태산에도 황제가 제천(祭天) 의례를 행하던 제단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만 불안을 안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 선생님, 직장인에게 까다로운 상사(上司), 운전하는 사람에게 교통순경, 진단 받으러 병원에 간 환자에게 의사, 사업하는 사람에게 세무서원, 그런 사람들은 오늘도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들이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세상에서는 하느님도 우리에 대해 임의로 판단하는 무서운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에 던져지는 가라지의 운명에 더 관심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밀 이삭과 더불어 가라지도 자라게 두는 주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뿌려서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고, 쉽게 버립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오늘 비유의 일꾼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밀도 가라지도 살리고 자라게 하는 분이십니다. 가라지가 추수 때 뽑혀서 불태워지는 것은 끝까지 가라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땅의 양분을 흡수하여 스스로 살고 자랄 궁리만 합니다. 가라지는 주변의 다른 생명을 위해 전혀 기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선과 악의 차이입니다. 밀은 양식이 되어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선은 주변의 생명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선하신 것은 그분이 세상 만물을 존재하게, 또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을 생명이라 부르기도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 혹은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아끼고, 돕고, 성장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존인데, 주변의 생명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을 악(惡)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는 우리의 생명이 지닌 양면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밀과 같이 우리 스스로를 제공하여 주변의 생명을 살게 또 발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녀들을 낳고, 보살펴 키우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니면서 인간 생명을 위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가라지와 같이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돕는 데에 인색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과소비하고, 사람들에게 횡포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뿌리신 생명들입니다. 밀로 자라서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되게 살라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들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15,22).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생활의 한가운데에 미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내어주고 쏟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로 살지 않고, 밀로 살아서 다른 생명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6,31-32).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풍부하여 보람 있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습니다.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밀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생명을 뿌리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배워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비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가라지의 안전대책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섬긴다고 말하면서, 자기 한 사람 행세하는 길을 찾는 것도 밀로 위장한 가라지의 행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 한 사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길을 찾는 가라지가 되지 말고, 주변의 생명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는 좋은 밀이 되어 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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