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9]

지난 장날, 유명 방송사 봉사단 주최로 우리 면에서 경로잔치가 열렸다.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출연하고, 양 · 한방 의료진이 무료 검진과 치료를 해준단다. 뿐만 아니라 커플 사진 촬영과 웨딩마치 이벤트에 경품 추첨까지! 별 다를 거 없는 밋밋한 일상을 사는 할머니들에게 와서 신나게 놀아보라며 청량음료 같이 톡 쏘는 유혹을 했다.

대부분의 할머니는 ‘얼씨구나!’ 하고 잔치 구경을 갔다. 마을에서 최고로 바쁜 수봉 아주머니도, 심심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한평 아주머니도, 앞을 못 보는 소리실 할머니와 다리가 아파서 놀지도 못한다는 광덕 할머니까지, 모두들 집을 나섰다. 밝고 화사한 옷을 입고서, 모처럼 얼굴에 화장품까지 찍어 바르고서 말이다. 잔뜩 들뜬 할머니들 목소리가 소풍 가는 여학생들처럼 떠들썩하게 마을의 아침을 깨웠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할머니들을 태운 택시가 마을을 빠져나가고, 마을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마을이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당을 정리하고 있는데,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도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잔치 구경 안 가셨어요?”
“이…… 꼬라지로…… 어디……를 간다요…….”

끊어질 듯 이어지며 힘겹게 흘러나오는 할머니 목소리. 도란 할머니 목소리를 들을라 치면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아들으려고 내 딴에 애를 쓰는 건데, 그럼에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왼쪽 다리와 팔, 얼굴까지 몸의 반쪽이 오그라들고 불편하시기에 발음 또한 무척 어눌하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서 신나게 놀다 오시지.”

도란 할머니는 대답 대신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웃으시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가셨다. 앞으로 푹 고꾸라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한 몸을 힘겹게 옮기셨다.

▲ 도란 할머니도 꽃을 좋아하신다. 할머니가 키우는 화분에는 처음 보는 예쁜 꽃들이 많다. ⓒ정청라

도란 할머니는 수줍음이 많으신 탓에 아직까지도 나를 어렵게 대하신다. 한참 어린 사람이니 편하게 대하셨으면 하는데 언제나 존대를 하시고 우리 집 마당으로 선뜻 들어오시지도 않는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시고, 먼저 말을 거시는 일도 없다.

처음엔 나에게 거리감이 있으신가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타고난 성격이신 듯하다. 사실 나도 심하게 내성적인 성격인지라 할머니를 십분 이해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흥미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일에 서툴다는 것을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그 누구보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도란 할머니는 성격이 쾌활하거나 명랑한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좋으신 것은 더더욱 아니건만 치우치지 않고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신다. 성질이 사나운 광덕 할머니와도, 광덕 할머니와 대적해서 싸우는 쌍지 할머니와도…….

때문에 도란 할머니 집은 우리 마을에서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비 오는 날이면 여럿이 모여 지짐도 부쳐 먹고, 할머니네 툇마루에 앉아 작은 꽃밭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나 역시도 누구 집에 편하게 들어가는 성격이 아님에도 할머니 집 댓돌 위에 신발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은근슬쩍 발길이 간다.

가서 보면 집 안이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이렇게 반짝반짝하게 집을 돌보시는 걸까?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셔서 하루에 두 시간씩 살림살이를 돌봐주신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원체 타고난 성품이 정갈하신 듯하다.

언젠가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계시는 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빨래를 만지는 손길부터도 나와 달랐다. 기우뚱거리는 힘든 몸으로도 빨래가 반듯반듯하게 될 때까지 몇 번이나 매만지셨다. 그걸 보며 할머니가 결코 허술하거나 서툰 분이 아님을 느꼈다. 그동안 ‘몸이 불편하시니까 아무것도 못하실 거야’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함부로 생각할 게 아니었다.

하기사, 도란 할머니는 누군가의 어머니이지 않나. 몸이 많이 불편하면 평생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 같지만, 할머니는 자식을 넷이나 낳아 키우셨다. 자식을 둘 낳아 키우면서도 힘에 겨워 할 때가 많은 나로서는 할머니가 지나온 세월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대체 어떻게 먹이고, 어떻게 돌보셨을까? 전해 듣기로는 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일은 안 하고 술만 드셨다는데, 그걸 지켜보는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도란 할머니 삶을 거슬러 들여다보다가 문득 지난 태풍에 쓰러진 벚나무가 떠올랐다. 나무는 뿌리가 반쯤 뽑힌 채 누워 있었지만 봄에는 분홍 꽃을 활짝 피워냈고, 꽃이 진 자리에 먹음직스런 버찌까지 매달았다. 정말이지 쓰러져 누워있다고 해서 함부로 볼 게 아니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해서 도란 할머니가 무력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엔 우리가 함부로 봐서는 안 되는 게 참 많다. 생명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제 몫을 힘껏(!!!) 살아낸다.

도란 할머니는_
올해 나이 여든. 평생 골골하면서도 여든이 되도록 산다며 다들 신기해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불편한 몸을 갖게 된 사연이 기구하다. 막 태어났을 때 딸이라고 실망해서 밖으로 집어 던졌는데, 그 일로 인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신 것이다. 그런 딸을 지켜본 부모 마음은 어땠을지…….

아무튼 힘든 몸으로 어렵게 사셨지만 2남 2녀가 장성해서 할머니를 극진하게 모신다. 거의 주말마다 와서 놀다 가고, 할머니 몸이 불편한 데가 있다고 하면 쏜살같이 달려와 모시고 간다. 어버이날에는 마을 어른들을 다 불러 음식 대접을 할 정도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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