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1]

 

하느님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도 하느님의 말씀일 수 있을까? 다소 의아스런 질문같지만, 물론이다, 있다. 이제까지의 논리대로라면, 하느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이라는 말이 없는 이야기에도 하느님이 계신다고 해야할 도리 밖에 없다. 실제로 구약성경의 일부인 ‘에스델’(개신교식 표현 에스더)이나 ‘아가’에는 하느님이 주요 주제가 아니거나 그런 낱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선입견 없이 읽으면 ‘아가’는 그저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듯 노골적인 사랑 노래이고, ‘에스델’은 한 여인의 헌신으로 인해 집단적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유대 민족 전체가 살아남게 된다는 한 민족의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에스델 1-4장은 유대인 에스델이 페르시아의 왕후가 되는 과정, 페르시아 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역시 유대인 모르드개가 무마시키는 내용, 최고실력자 이방인 하만이 유대인 전체를 학살하려는 음모, 에스델의 공로로 유대인 학살 음모가 수포가 된 사연 등등을 담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리스도교에서도 그 취지를 인정해 성경 안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이 특정 민족을 초월해 어디서든 작용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겉으로만 보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위태롭게 살아간 한 소수민족의 과거사에 지나지 않겠지만, 전체 역사와 삶이 하느님의 인도로 이루어져왔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사건이 되고, 따라서 ‘거룩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교제의 대상을 하느님으로 바꾸어 읽을 줄 아는 이에게 한갓 연애시는 절절한 신앙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갓 보잘 것 없는 일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줄 아는 이에게 그것은 얼마든지 하느님의 계시이자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식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성서가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말씀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읽어도 읽어도 알 수 없는 지루하고 어려운, 나와 상관없는 공허한 남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겉표지에 “성경(聖經)”라 써있다 해서 무조건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겉표지에 “성경”이라는 말이 써 있지 않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면 그렇게 느끼는 이에게 그 책은 성경이다. 책꽂이 한 구석에서 몇 년인지 몇십년인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책을 어찌 성경이라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세상 천지가 성경이어야 한다. 모든 곳을 하느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보고, 그런 안목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쿠란>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마치 구약성경을 읽는 느낌이 든다. 다양한 아랍어 고유명사가 한국인에게는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의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인생의 전환을 경험한 뒤 신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면, <쿠란>이 그저 그리스도인과 무관한 남의 이야기이기만 할 수는 없다. 도리어 하느님은 <쿠란>을 통해서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하느님이라는 낱말 한 번 나오지 않는 ‘아가’가 ‘거룩한 책’(성경)이듯이, 읽기에 따라 <쿠란>이 거룩한 책이 아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불교의 <화엄경>에서 인생의 전환을 경험하기도 했다. 거기서는 세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작은 사건 하나도 사실상 전 우주를 담은 우주적 사건이라는 사실, 먼지 한 점도 나의 온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목수의 눈에 띈 뒤 오늘 내 책상으로 재탄생했다는 시각으로 기록된 관계성의 가르침들... 그러한 사실을 곰곰 씹으며 세계를 다시 보니 정말 그랬다. 세계가 어느 것 하나도 분리는 커녕 유기적 관계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는 적나라한 실상이 <화엄경> 안에서 보이는 것이다. 나는 화엄사상에서 인간과, 삼라만상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내 그리스도교 강의를 수강한 한 학생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자기 집안은 불교 집안이고 자기도 불교신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예수님에 대해 알아보겠노라, 교회에도 한 번 나가보겠노라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가 교회 출석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그 학생은 그리스도교인이 믿는 예수가 그렇게 배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에 대해 한 번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좋겠고, 기왕 자신이 알던 불교를 제대로 알고 믿는 것도 충분히 좋겠다는 답신을 보냈지만, 어찌되었든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한 그리스도교인이 던지는 불교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용한다. 

이런 안목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무속에서 신으로 섬기는 최영 장군, 조선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구해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등과 같은 분들이 모두 하느님의 사자가 아닐 수 없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쓰게 된 것도 이런 안목에 따른다. 우리 역사서에 성서적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하느님의 말씀과 무관한 역사라 하겠는가. 하느님이 우리 민족 안에 없었던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은 없다. 하느님이 없던 곳과 때가 있다면 그 하느님은 우주적 창조자가 아니라 제한적 유한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리라. 하느님이라는 낱말을 구경 한 번 할 수 없는 ‘아가’가 ‘성경’이 될 수 있듯이, 예수라는 말을 외치지 않는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이미 계실 수 있다. 그런 안목을 가지고 다종교적 사회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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