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김대우 감독, 2014년작

▲ <인간중독>, 김대우 감독, 2014년작
군대에 대해 모른다. 하지만 영화 <인간중독>의 김진평 대령(송승헌 분)은 보는 순간 바로 알았다. 군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1969년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대령임에도, ‘전쟁 영웅’임에도, 심지어 곧 ‘별’을 달게 됨에도 그는 군대 체질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부적응이었다. 그런 그가 진급 운은 억세게 좋다. 장인의 힘과 장군의 딸인 아내 이숙진(조여정 분)의 대단한 내조 덕이었을까.

베트남에서 적을 ‘섬멸’한 일종의 살인 기계였던 순간에는 그도 잠시나마 군인 체질이었을까. 정말 그랬을까. 어쨌든 한국 땅으로 돌아온 현재, 남은 건 일상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막막함뿐이다. 그렇게 계급이 높은데 그렇게 적응 못하는 군인을 보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가 있을 유일한 곳인 군대 안에서 남들보다 앞서가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실은 어딘가 망가지고 부서진 채 끝없이 부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아직도 베트남의 정글과 적의 피로 물든 강물을 헤매야 했다. 그는 공황장애를 심각하게 앓고 있지만, 진료 기록도 ‘감기’로 숨겨가며 약도 남몰래 먹어야 했다. 그는 아픈 사람이다. 전쟁을 겪어 마음에 장애를 입은 상태다. 하지만 군 관사는 벽에도 남의 눈과 귀가 달린 듯 서로를 옥죄고 감시하는 곳이었다. 김진평은 그저 하루하루를 모면하듯 산다. 사는 일이 너무 힘든데 너무 어설프다.

진심을 감당한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관사에 사는 경우진 대위(온주완 분)의 아내 종가흔(임지연 분)을 보게 된다.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인 ‘부하의 아내와의 불륜’은 폭탄 터지듯 격렬하고 요란하다. 돌이킬 수도 번복할 수도 없는, 그러나 그 시한폭탄 같은 관계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숨이 쉬어진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그게 뭐든 이제 이 느낌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인간중독>은 관객이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금지된 사랑은 일말의 짜릿함이나 달콤함도 없고 대령이라는 계급에서 기대되는 특권마저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가흔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부끄러워한다. 베트남에서의 무공은, 사람이 아니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아프다. 게다가 종가흔은 전혀 김진평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관객이 혼란을 느낄 정도로 종가흔의 태도는 모호하다. 그녀는 새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갇혀 있는 존재다. 새장이 답답하지만 그 철망은 동시에 안온함을 뜻한다. 다른 세상, 철망 속이 아닌 세상으로는 한 발짝도 나설 자신이 없다. 사랑보다 더한 무엇으로도 그 묶인 발은 움직여지지 않을 듯하다.

 
관객이 기대한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가지 않는다. 다만 사랑에 대한 몰입도를 묻는다면 단연 돋보이는 데가 있었다. 사랑을 ‘둘의 관계’라고 보았을 때, ‘둘’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철저히 배경으로 만들었고 끝내 그 점을 밀고 나갔다. 김희애와 유아인의 드라마 <밀회>와 비교한다면 단연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이든 그의 아내든, 이 ‘둘의 관계’라는 관점에서는 철저히 배제돼 있다. 영화 <인간중독>은 조연들에게 아예 ‘사연’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자신의 심경이나 감정을 눈곱만치도 내비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주인공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의 속내에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배경이므로 악역이든 방해물이든 그 주어진 임무만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현실 속에서는 출세도 하고 잘 적응하며 살았을 법한 ‘생생한’ 인물들인데 말이다.

<인간중독>은 사랑에 중독된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관계 설명을 과감히 삭제했다. 대신 오직 둘이서 전부 감당해야 한다. 영화 자체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호불호가 심하게 엇갈린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 경우진과 김진평이 남자끼리 종가흔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조차 없다. 양쪽 집에서 부부가 ‘낌새’ 따위로 다투는 장면도 없다. ‘제3자’의 심정에 대해 감독과 제작진은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두 사람의 사랑, 그 사랑의 순도, 그 사랑의 생성과 파국에만 집중한다.

진정성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영화는 그래서 ‘사랑’ 이후의 스토리에도 관심이 없다. ‘아이’조차 끼어들 수 없는 영역이다. 김진평의 입장에서는, 그 여자 종가흔 외엔 세상 그 무엇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과 만난 이후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대신 종가흔에게는 주변 사람들이 늘 의식 된다. 특히 시모와의 관계는 일종의 탯줄이다. 군인의 상징인 식별표를 달고 있는 남편, 그리고 연인과의 잠자리, 그 딸랑거리는 소리가 늘 들리는 침실. 그곳 외엔 갈 데가 없는 그녀. 그 소리가 종가흔의 가장 또렷한 현실인식은 아닐까.

목줄을 끊고 마침내 참 자유인이 된 김진평의 마지막은 눈물겹다. 그러나 감동적이다. 김대우 감독의 작품 속 그 누구도 이처럼 처절하게 극단적이지 않았다. 부서진 채로라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갔다. 구차할지라도. 그런데 김진평은 달랐다. 그는 사랑으로 인해 자유를 목숨 걸고 희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유를 누렸다. 사랑에 임하는 그의 진정성이었다.

진정성이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때로 사랑 앞에 우리는 얼마나 비겁한가. 누군가에게 사랑은 왜 자유와 닮은꼴인가. 왜 새장 속의 굴종으로는 진정 사랑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김진평은 과연 그 답을 얻었을까. 종가흔은 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마지막에 흐르던 노래 ‘The Rose’의 가사처럼 그저 바보들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 다 아는 척하지 말자.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남겨두면 또 어떠리.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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