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목하는 수녀, 박북실(성심수녀회)

 

자리에서 환하게 웃어제끼는 박 수녀는 카메라를 들이대면 손사래를 치며 수줍어 어쩔 줄 모른다.

전주 태생인 박북실 수녀(46세)는 성심여고 출신이지만, 성심수녀원엔 에둘러 들어갔다. 박 수녀는 안동 상지대 간호학과를 나와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수녀원 문을 두드린 것이다. 지금 덩치를 보면 믿기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성소의 길을 터준 것은 어린 시절에 앓았던 병 때문이다.

부모님은 아들을 보자고 연거푸 자식을 낳아 딸을 다섯이나 두었는데, 그중 넷째딸이 박 수녀다. 어려서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고 용하다는 의원은 다 불러들이고, 어머니가 불교 신자인데도 스님이고 수녀님이고 다 청해왔던 모양이다. 어느날 병석에서 지긋이 눈을 떠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머리맡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단다. 그이는 수녀였고, “참 좋다”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성심여고에 다니면서 2학년 때 영세를 받게 되었는데, 삼각지 살던 때였다. 친구들은 다들 상명여고나 신광여고 등에 추첨되어 갔는데, 유독 자기만 성심여고에 들어가게 된 것도 천운이라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괜히 성심여고 간 게 아니겠지, 하고 지금도 박 수녀는 생각하고 있다.

고한에서, 수녀라는 ‘존재’

성심수녀회는 수도복을 따로 입지 않는다. 그저 동네 아주머니거나 때로 비정규직 노동자같다.
대학 다니면서 살레시오수녀원과 프라도수녀회 등을 노크해 보았지만, 웬지 성심수녀회에 더 매력을 느껴 결국 28살에 입회하게 되었다. 2003년에 종신허원을 하였는데, 벌써 18년째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수녀원에 들어갈 맘을 먹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박 수녀는 “유년기 때 기억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병석에서 보았던 그 수녀님. 사실 저는 한 사람만 사랑하고는 못 살 것 같더라고요. 저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사랑해요, 성격적으로.” 하면서 품 넓은 그녀는 수도성소를 ‘성격탓’으로 돌렸다.

그녀가 노동사목을 시작하게 된 것은 2004년 8월부터였다. 수도생활 초기부터 당시 청원장이던 손인숙 수녀(손인숙 수녀는 예전에 오랫동안 부천 노동사목에서 일했다)에게 노동사목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고, 유기서원을 할 때 노동사목을 청했으나, 결국 종신서원을 하고서야 노동사목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박 수녀가 노동사목에 오기 전에 유기서원하고 간 첫 소임은 강원도 고한성당 본당수녀였다.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는 고한성당 생활. 한 2년 정도 본당수녀로 있었는데 마치 이틀 정도 다녀온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신자도 별로 없는 작은 공동체라서 오히려,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처음엔 본당 신자들이 약속도 어기고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아서 속을 끓였는데, 연례피정을 하면서 많이 반성해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함빡 웃는다. 고한은 점점 폐광지역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당시엔 더러 광부들이 남아 있었다. 광부들은 갑을병으로 돌아가며 갱도에 들어가곤 했는데, 남편이 오는 시간이면 부인들은 어김없이 남편을 기다리고, 피곤하면 잠을 먼저 청해야 했던 탓에 번번이 수녀와 걸어놓은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 꼼꼼히 시간과 약속을 따지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생활이 주는 피곤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여물지 못한 수녀의 투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후로 본당 신자들은 박 수녀에게서 짜증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행복해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수도자들은 처음 소임을 맡으면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 제 욕심대로 만사를 끌고 가려고 한다. 그렇지만 성숙해지면, 그들과 더불어 현존하는 데서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누구보다 수도자는 일보다 사람을 우선해야 하는 법이다. 스승이신 그분이 그러셨으니까.”

박 수녀의 ‘따짐없이 닥치는 대로 사랑해’식 사목은 서로 편한 관계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면 신자들이 자매요 친구가 된다. 집에 방문해서 방바닥에 그냥 신문지 깔고 밥 나눠 먹고, 장보러 가다가 들러서 수다 떨고, 그들 속에 이웃으로 섞여 살면서 ‘사람 사는 행복’을 나누어 가진다. 사실 수녀랑 다른 신자들과 다를 바 없다. 작은 데서 기쁘고 작은 데서 슬퍼하는 것이다. 주일날 미사 끝나면 만항재로 놀러가 신자들과 고기 구어서 먹고 즐거워했다. 고한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일도 잘 풀린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노동사목 활성가들에게도 “일 잘 하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관계 잘 맺으라”고 말한다.

오매불망 노동사목

주안공단에 있는 노동자센터, 박 수녀의 일터다. 
인천시 주안에 있는 노동자센터가 박 수녀의 일자리다. 그곳에서 박 수녀는 따로 맡은 소임이 없다. 그냥 집을 지키고 있다가 거들만한 일을 할 뿐이다. 실무자들과 이 집에 드나드는 노동자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그래도 몇 가지 하는 일을 들어보라면, 매주 월요일 저녁 8시마다 몇 사람이 모여 성경공부 하는 걸 돕는다. 제 사는 꼴과 만난 사람들 속에서 성경을 읽고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할 일을 찾는 것이다.

요즘은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아서 못하고 있지만 노동자 예비자교리반도 운영한다. 이렇게 신앙의 측면을 다루는 것은 성심수녀회의 창립자인 마들렌 소피 수녀의 말이 항상 일 속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그분은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 멋진 말이다. 이걸 성심회 수녀들은 ‘한 영혼’ 영성이라고 부르는데, 앞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더라도 기다리지 않고 교리를 시작할 참이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면 성탄절에 인천교구 노동사목 담당 사제가 세례를 준다.

최근에는 교구청에서 사회교리대학을 운영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부를 마친 사람들 중에 뜻이 있는 사람들을 모와서 ‘사회교리 소공동체’도 운영한다. 배운 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려면 공동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국미사도 참석하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할 일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매월 둘째 주 목요일에는 생활나눔 중심으로 진행되는 노동자 월례미사를 봉헌한다. 주로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인데, 뾰족한 해결책을 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제 사정을 털어놓을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수녀가 밥 먹듯 하는 일이란

이렇게 늘어놓으면 하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주로 내 역할은 노동자들 오면 밥을 지어 먹이는 것”이라고 박 수녀는 못을 박는다. 그리고 집 구조로 되어 있는 이 노동사목 공간에는 신자가 아닌 노동자들이 더 많은데, 수녀가 앉아 있으면 그 존재만으로도 노동자들이 편안한 느낌을 받는 모양이라고 말한다. 박 수녀는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나 노동자들 농성장에 가는 게 밥 먹듯 하는 일이다. 노동상담이야 실무자들이 하는 것이고, “그들 곁에 서 있어 주는 게 내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녀가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나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 때문인데, 회사에서도 비정규직은 통근버스도 못 타고, 쉬는 시간도 짧고, 밥도 따로 먹고... 그런다는 것이다. 특히 홈에버 등 대형매장에서 일하는 서비스 계약직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매장에서는 그 넓은 매장에서 단 한 군데 화장실만 지정해서 쓰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참아야지, 하며 볼일 보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인천교구 노동자센터 앞 공단거리, 오후 시간 아직 거리엔 아무도 없다. 다들 공장에선 바삐 일하고 있을 텐데. 


수도자는 내가 만나는 사람 안에서 사는 것

박 수녀가 노동사목을 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아무래도 손인숙 수녀다. (성심수녀회에서는 인천교구 노동사목에 김근자, 김영선 수녀 등 꾸준히 소속 수녀를 파견해 왔다.) 한국관구장을 지내다 로마 총원 참사를 지내고 얼마 전에 귀국한 손 수녀는 노동사목뿐 아니라 1980년대 상계동 철거민투쟁에서도 혼신을 다하셨던 분인데, 수도자들의 사회적 실천에 정신적 세례를 주었던 수도회 어른이다. 손 수녀는 “수도자는 내가 만나는 사람 안에서 몸으로 사는 것이지, 수녀로서 그들과 동떨어져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왔다. 박 수녀는 손 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늘 “어느 현장에서든 방관자나 객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려면 그들 삶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박 수녀는 노동사목으로 처음 소임을 받아 왔을 때 우선 <전태일 평전>부터 다시 읽었다. 박 수녀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꼽으라면 바로 전태일이었구나”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안 노동자센터에는 매년 신학생들이 몇 명씩 현장체험을 하러 오는데, 그들에게 박 수녀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알고 싶으면 그 책을 읽으라”고 말하곤 한다. 박 수녀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예수를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가능하려면 먼저 기도의 힘을 믿어야 함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내 갈 곳이 어딘가, 하고 진정으로 찾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도와 깊은 영성이 없이는 사람 사이에서 특출나게 일하지 않으면서 ‘그냥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냥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누군가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폼 나는 일을 하고 싶을 텐데, 그냥 있으면서 뭔가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친구를 한 사람 얻어라

박 수녀에게 영적 선물처럼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현장체험을 하러 오는 신학생들이었다. 교구 중에는 요즘 전주교구에서만 신학생들이 꾸준히 오고 있으며, 수도회 가운데는 예수회, 성심수녀회, 한국남자순교복자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등에서 간간이 현장체험을 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사목 집에 머물며 한 달이나 6-7주 정도 공장생활을 경험하게 되는데, 구직(求職) 체험부터 시작한다. 학교에서 일등이 사회에서도 일등이 아닌 것처럼, 구직체험을 하면서 똑똑하고 대접받기만 했던 신학생들이 타인에게 거절당하면서 많이 배운다.

박 수녀는 “우리는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수도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수도자들은 몸보다 머리로 살려고 하지만, 노동사목에서 현장경험을 하게 되면,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몸뚱이 하나로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현장 경험을 하면서 한 주일에 한 번씩 함께 모여서 나눔을 하는데, 그 때마다 박 수녀는 현장에서 “노동자 친구 한 사람씩 꼭 사귀라”고 권한다. 친구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동등하게 만나는 것이라서, 두고두고 그 사람과 교제할 수 있다면, 현장을 떠나고 다시 수도원이나 신학교로 돌아가더라도, 심지어 사제가 되더라도 그 첫마음을 잊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고, 노동하는 인간을 기억하는 것은 스승 예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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