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11화 (열한 살 때 1950년)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쌕쌕이들이 더 자주 나타나고, 쿵 쿵 쿵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면서 우리가족은 영주의 북쪽 외곽 마을인 보름골인가 하는 마을로 또 피난을 갔어. 이제 인민군들도 도망가기에 바빠서 우리를 더 이상 간섭하지 못했지.

9월 15일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완전해 수복했으니까, 아마도 서울수복 직후에 보름골로 피난을 가신 거네요, 할아버지?

그럴 거야...... 피난하고 나서는 쌕쌕이소리 대포소리 총소리가 더 심해졌고, 특히 밤에는 굵고 가는 빛줄기가 하늘을 꽉 채웠고, 대포소리 총소리가 훨씬 더 요란했지. 마을 뒷산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 대포알 총알이 불빛 은빛으로 밤하늘을 지나가는 게 보였지. 대포소리 총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환상적인 불꽃놀이로 느꼈을 거야. 

드디어 국방군과 유엔군이 영주에 가까이 온 거야. 마을 뒷산에 포탄 터지는 소리가 쿵쿵쿵, 우리가 머물던 집까지 흔들어대던 어느 날 밤, 우리는 할머니의 금령으로 문밖을 기웃거리지 못하고, 그 집 방구석에 코를 박고 있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집 근처에서 ‘죽여라, 때려죽여, 이 빨갱이새끼들!’ ‘퍽퍽퍽......’ ‘윽, 나 죽네, 악!’ 하는 남자들의 흥분된 소리,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어. 여럿이서 몇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있었지.

새벽이었어. 몹시 궁금해서 나가보려고 했지만, 할머니의 험상궂은 얼굴과 쇳소리 엄명으로 결국 나가보지 못했지. 할머니는 ‘인민군 치하에서 숨어 지내던 이들이, 두어 달 동안 무슨 인민위원장 따위 감투를 쓰다가 미처 도망 못 간 이들을 때려죽이고 있는 모양인데, 아이들은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면 안돼!’라고 하셨어. 하루 사이에 세상이 바뀐 거야. 아침에 나가보니 세 사람이 맞아죽었대. 무법천지였어. 세상에! 사람을 때려죽이다니. 끔찍한 시절이었지!

사상도 전쟁도 정말 무섭네요, 할아버지?

모두가 미쳐서 날뛰게 되나봐!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사상이니 전쟁이니 하는 악은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해. 때려죽인 사람들은 통쾌한(!) 복수를 한 것일까? 반공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확보한 것일까?

피난민들이 속속 돌아왔어. 하루는 읍민들을 서부국교(지금의 영주초등) 바로 뒷산 골짜기(숫골?)에 모이게 했지. 그런 자리에 우리 아이들이 빠질 리는 없고. 골짜기 양 옆 비탈에는 벌써 남녀노소 읍민들로 꼭 차 있었어. 모두가 선 채로였는데, 어른들은 심각한 얼굴로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공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지.

이윽고 포승줄에 묶인 두 사람을 비교적 넓은 골짜기 가운데로 끌고 나오더니. 서로 등을 맞대게 하여 둘의 허리를 하나로 꽁꽁 묶어서, 등은 붙이고 얼굴은 서로 반대쪽을 보게하고는, 서로 반대쪽으로 다리를 뻗도록 강제로 앉혔어. 관중(!)은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고...... 더러 한숨소리도 들렸어. 그리고는 휘발유 통을 들고 가서 둘 위에 듬뿍 끼얹은 후 불을 붙였어. 확, 활활, 찌지직 찌지직, 묶인 둘을 새빨간 혓바닥 같은 불꽃들이 휘감더군. 불길 속에서 둘은 잠시 그대로 버티더니, 금방 흔들흔들하다가 옆으로 쓰러졌고, 불은 찌지직 찌지직 소리를 내며 거세게 타올랐어. 관중석(!) 여기저기서 작은 한숨소리가 들리는데, 잠시 후 불도 두 사람도 사라지고 뼈 몇 개만 남더군. 관중(!)은 힘도 말도 없이 흩어져 갔어. 무슨 본때를 보이자는 짓인데, 세상에! 사람을 태워죽이다니, 그것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법천지였지.



너무 무서워요, 할아버지! 불에 타 죽은 이들은 좌익이고, 불에 태워 죽인 이들은 우익이겠죠?

그렇지! 며칠 전까지는 좌익세상이었으나, 이제는 우익세상이 되었으니까. 좌익은 무엇이고 우익을 무엇인지! 나중 생각이지만, 둘 다 무슨 숭고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순전히 이해관계-탐욕이 빚은 광증이라구. 너 죽고 나 죽자는 미친 짓거리지

하루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서 놀다가 이상한 광경을 봤어. 우리집 옆 제방 위로, 포승줄에 묶인 두 사람을 앞세운 국방군 다섯이 총을 겨누며 따르고 있었어. 묶인 두 사람은 찢어진 인민군 장교 옷을 입고 터벅터벅 힘겹게 걷고 있었고, 넷은 소총을 하나는 권총을 들고 있었어. 우리 아이들은 마치 미행을 하듯, 제방 비탈을 기면서 뒤를 따랐지. 영주-봉화간 철길과 영주-안동간 철길이 갈라지는 곳 둑 아래로 내려가더니, 소총소리가 네 번, 그리고 잠시 후 권총소리가 두 번 났어. 두 번의 권총소리는 ‘확인사살’이라고, 우리 아이들은 판단했었지. 제방 위에서 몰래 내려다보니, 허리에 차고 온 군용 야전삽으로 둘의 시체를 대충 묻고는 오던 길로 사라졌어.

겁이 난 우리 아이들은, 멀리서 그 무덤(!)을 확인하고 각자 집으로 달려갔어. 집에 새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지. 집으로 뛰어 온 나는 할머니에게 그 놀라운 사실을 보고하니까, 할머니께서는 ‘그 무덤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억울한 원혼이 너한테 붙어서 꼭 해코지를 할 테니까’하고 말씀하셨어. 다른 집 아이들도 집에서 그것과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먼발치에서 힐끔힐끔 그 무덤을 훔쳐보면서 지나다녔지. 어른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얼마 후에 슬쩍 보니까, 큰 뼈다귀 하나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어. 높이가 40센티쯤 됐을 거야. 어른들은, 동네 개들과 까마귀가 시체를 뜯어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하늘로 치솟은 뼈다귀에 너덜너덜 찢어진 인민군 옷이 붙어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뼈다귀 깃대에 무슨 깃발이 펄럭이는듯 보였어. 동네 어른들은 애써 못 본 체 했고, 아이들은 어른들 엄포가 겁이 나 가까이 가 보지 못했어. 1951년 우리집이 봉화로 이사할 때까지, 나는 거의 매일 외롭게 펄럭이는 뼈다귀 깃발을 훔쳐봤어. 나중 생각이지만, 그때는 불쌍하게 죽은 시체를 묻어주는 것조차, 아니 흙 몇 삽 덮어주는 것마저 기피하던 냉혹한 시절이었지. 빨갱이로 몰릴까봐 겁을 낸 거지.

옛날 얘기가 아니죠, 할아버지? 요즘도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로 몰리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따돌림을 당하잖아요? 빨갱이 조작사건인 이른바 인혁당사건만 하더라도, 그 가족들이 겪어 온 억울하고 서러운 따돌림의 세월이 이제서야 밝혀지기 시작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무서운 원죄지......

학교가 문을 열었어. 형은 5학년 나는 4학년 여동생은 2학년인데, 형과 나는 다시 학교에 나갔지만, 여동생은 집살림을 맡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공부를 계속하지 않겠다는 거였어. 이 여동생은 생활력이 무척 강해서, 우리집 주부 몫을 거뜬히 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집 살림꾼이 될게 분명하지만,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누가 시키거나 말려도 자기주장과 다르면 듣지 않는 성격이었지. 하기야 나도 그런 면이 강하지만.

영주중부국교(지금의 영주중앙초등)는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학교건물도 겨우 두 동뿐이었는데, 그 중 한 동은 폭격을 맞아 허물어졌어. 우리는 교실이 없어서, 선생님이랑 작은 칠판 하나 들고, 어제는 남의 빈 집에서 오늘은 산 속 나무 밑이나 냇가에서 공부를 했어. 물론 교과서도 없었지. 아이들도 적었어. 피난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정부도 학부형도 교실을 지을 힘이 없어서, 꽤 오랫동안 그렇게 유랑학교를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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