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탐구생활 - 8]

몇 달 전에 광덕 할머니 집에 제사가 있었다. 방앗간 아줌마가 떡을 세 상자나 들고 배달을 하러 오셨기에 나는 내심 떡 얻어먹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광덕 할머니가 인색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는 주겠지 싶었다. 할머니가 우리 아이들을 예뻐하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동안 나도 할머니가 오시면 하다못해 효소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나름 이것저것 나누어 왔기 때문이다.

군침을 삼키며 떡이 언제 오나 기다렸는데 웬걸, 떡은 구경도 못했다. 제사 다음날에 광덕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기에 얼른 손에 뭐가 들렸나부터 봤지만 할머니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그 많은 떡은 죄다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셨단 말인가?

내색은 안 했지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떡 하나에 빈정 상하는 내가 부끄럽지만 그게 나인 것을 어쩌랴.

그때 이후로 나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버렸다. 광덕 할머니가 오시면 먹을 게 있어도 감추게 되었고 누군가 광덕 할머니에 대해 안 좋은 얘길 하면 속으로 맞장구를 치게 됐다. 아닌 게 아니라 워낙 악명 높은 분이라 미워하려고 하면 미워할 구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광덕 할머니 심술보를 논할라치면 놀부 마누라와 어깨를 겨누는 수준은 되리라.

마을회관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하며 다른 할머니들 구박하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소리 지르며 싸움 걸기,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사근사근 친절하고 남이 부탁을 하면 매몰차게 거절하기,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 이간질하기, 뒤에서 남 욕하기, 내 건 절대 남 안 주기…….

▲ 할머니네 담장에 포리똥 열매가 눈부시게 빛난다. 포리똥 열매로 효소를 담그고 싶어 하는 이웃들도 감히 탐내지 않는다. “광덕댁이 주간디? 안 줘” 하시면서……. ⓒ정청라

그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 가운데 광덕 할머니를 고운 눈으로 안 보는 사람들이 많다. 좀처럼 다른 사람 험담을 하시지 않는 쌍지 할머니도 어느 날인가 나를 찾아와 하소연처럼 속엣말을 하셨다.

“광덕댁은 이짝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광주서 노가다 일을 하다 온 사람이여. 말하자면 굴러온 돌인디 지가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어. 백힌 돌을 뽑아 낼라고 말이여. 내가 다른 할매들처럼 지 맘대로 안 되니께 나를 휘어잡으려고 하는디 내가 휘간디? 택도 없단 말이여.”

사정을 자세히 듣고 보니 쌍지 할머니와 광덕 할머니가 크게 다투셨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쌀이 떨어져서 돈을 만 원씩 걷어 쌀을 사기로 했는데 소리실 할머니가 정신이 없어서 돈을 두 번 내셨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광덕 할머니가 모르는 척 돈을 두 번 다 받자 쌍지 할머니가 한 소리를 하셨단다. 다른 할머니들은 광덕 할머니가 무서워서 보고도 못 본 척했지만 쌍지 할머니는 가만히 계시지 않았던 것. 그리하여 광덕 할머니는 한 번밖에 안 받았다고 하고, 쌍지 할머니는 두 번 받았으면서 무슨 소리냐고 하고, 옥신각신 다투게 되신 것이다.

쌍지 할머니 쪽 말만 들어서는 일의 진상을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일로 해서 쌍지 할머니가 회관에서 밥도 못 드시게 된 걸 보면 광덕 할머니 힘이 세기는 세다. 나이 여든에 어쩜 그렇게 기가 팔팔하고 사나우신 걸까. 지금도 이렇게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데 젊어서는 도대체 어땠을까.

광덕 할머니께 직접 물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도 말어. 나나 되니께 그 시상을 살았제 놈은 살도 못해. 할아부지가 한량이라 일은 안 하고 평생 놀아. 내가 노가다 일을 25년을 해서 자석들 7남매 먹이고 갈치고……. 여그 이사 들어와서도 겨울에는 대전으로 식모살이 나갔당께. 막내 대학 갈칠라고. 이 악물고 발악발악 살았응께 이 정도가 됐제 안 그러면 살도 못했어.”

어찌 보면 광덕 할머니는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와 힘겨루기를 하며 더욱 사나워지신 건지도 모른다. 여자 몸으로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은 아닐 텐데, 타고난 성깔과 체력을 밑천으로 그나마 아등바등 버텨 오신 거겠지.

물론 광덕 할머니도 한 해가 다르게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신다고 한다. 더구나 지난 겨울에 허리 수술을 하신 뒤로 다리가 불편해져서 걷는 것도 힘들다고 하신다. 때문에 고사리 끊으러 다니는 다른 할머니들을 보며 “나는 이제 고사리는 졸업을 했으니께” 하시며 허탈한 표정을 지으시기도 하고, “농사를 줄이기는 줄여야 할 텐데” 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네 발로 기어서라도 욕심껏 농사를 지으시지만 말이다.

그런 광덕 할머니를 보며 거침없는 성격과 불같은 성질도 세월이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좋든 싫든 가진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인생길의 막바지 고개에서, 할머니는 얼마나 힘이 들까. 이제껏 내려놓지 않고 움켜쥐는 힘으로 살아왔는데, 없이 사는 설움이나 힘겨움도 있는 힘껏 소리치며 이겨왔는데,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고개를 넘어가야 하지 않나. 광덕 할머니의 인색함이나 매정함도 세월 앞에서는 언젠가 무력해지리라.

그렇게 따지고 보니 사사로운 일로 미워하고 못마땅해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르는 척 껴안고 함께 오늘을 사는 수밖에.

오늘도 광덕 할머니를 보면 반갑게 뛰어나가 아낌없이 제 손에 든 먹을거리를 나누는 다울이를 보며, 나는 얼음을 녹이는 해님 같은 사랑을 본다. 그것만이 나에게 놓인 숙제이고 임무이겠지?!

광덕 할머니는_
이 마을에 이사 와서 처음 뵈었을 때 광덕 할머니 나이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워낙 힘이 넘치고 정정하셔서 말이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신세 한탄부터 하셨다. 어쩌다가 이 산중에 들어와 고생을 하고 산다면서, 할아버지가 산을 좋아해서 억지로 끌려 들어왔다면서……. (그 말 속에는 나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3~4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 사시는데, 외롭고 쓸쓸하신지 틈틈이 우리 집에 들러 아이들을 쳐다보시고는 한다.

한편, 동티 어르신 기계를 빌려 농사를 짓다 보니 동티 아주머니와 어르신에게만 특별히 정답게 대하신다. 뒤에서는 억눌린 감정을 험담으로 풀어내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청라
귀농 8년차, 결혼 6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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