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14]

송학리 아저씨와 산골짜기 묵은 밭을 정리했다. 오랜만에 손에 쥔 예초기를 들고 반나절동안 풀을 베었더니, 새참으로 가져온 커피를 마실 때 손이 떨려 컵을 들어올리기도 힘들다. “안 하다 해서 그렇다”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신비하리만큼 정직한 내 몸의 반응에 경이로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저씨는 산림 조합에서 나무 다루는 일을 많이 해서인지 나무 종류에 맞게 간벌도 잘 하고 가지치기도 능수능란하다. 익숙한 농부의 여유로운 몸짓에 부러움이 밀려온다.

자연 속에서의 노동은 인간이 우주와 하나가 되는 유일한 통로 같다. 그래서인가? 중국의 유명한 조사(祖師)인 회해 스님이 백장산에 독립된 총림을 세우고 자급자족의 수행공동체를 만들었을 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수행하는 기본규칙을 세우셨다. 훗날 백장선사로 불리는 회해 스님은 자신부터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먹지 않는다)을 평생 한 차례도 어기지 않았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지금 불가에서 스님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울력이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라는 기독교인은 “읽어야 할 것은 성경이요, 배워야 할 것은 자연이요, 행해야 할 것은 노동이다”는 좌우명을 동료들과 함께 지키며 땀 흘려 일하는 기쁨에 근거한 공동체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의 삶이 곧 자기들의 좌우명과 같은 생활이었다고 확신하였으리라.

하루 땀 흘려 일해야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 위에서 거론한 사람들처럼 항상 어떤 가치를 인식하며 땀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땀내 나는 삶과 매우 다른 삶을 사는 불한당(不汗黨;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 마을의 할아버지 가운데 80여 년 전 일을 기억하는 분이 있다. 할아버지는 “근처 마을에 높은 관직으로 있던 사람이 살았는데 호령 하나로 아랫사람들의 땅을 자기 것으로 바꾸는 일이 종종 있었어”라고 회상한다. 어디 땅뿐이었겠는가? 탐나는 물건이나 예쁜 처자인들 그들의 탐욕을 빗겨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서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말로가 별로 나은 점도 없었어. 도리어 그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하며 뒷이야기도 전해준다.

인류 역사가 불한당들의 머리와 수완에 의해 발전해 왔다고 믿는 것도 불한당들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오히려 불한당들 때문에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이 차별과 고통을 받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불한당들이 만든 이념이나 체제가 진정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실현된 적이 있는가?

ⓒ이철수 www.mokpan.com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이 무지한 자들로부터 침해를 받지 않게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613개의 율법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일반 백성들을 무지한 사람 또는 저주받은 자들이라 폄하하면서 자신들을 그들과 구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들이 만든 법을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위선되고 악한 자라고 책망하였다.

세계 역사에서도 불한당들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법조문들과 통제 수단들이 과연 인류 모두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이 내세우는 깃발과는 달리 그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일반인들과의 차별에서 오는 유리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마음대로 바꾸기도 하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냉소적인 생각을 가라앉힐 만한 적절한 모델이 없다. 기껏 예수, 묵자, 간디 등 결국 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스러져간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들을 위안 삼아 불러볼 뿐이다.

요즘 거짓되고 왜곡된 보도를 하는 기자, 터무니없는 말로 편협한 자기 주장만을 강변하는 성직자, 논문 조작 · 표절 · 탈취를 뻔뻔하게 저지르며 궤변을 늘어놓는 학자, 국민의 안위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권력에만 혈안이 된 정치인 따위들을 부를 때 이름 뒤에 ‘~레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들 이외에도 쓰레기 취급 받는 부류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모두 불한당들이라는 뜻이다. 땀을 흘리지도 않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남들이 땀 흘려 모은 재산과 영화를 거저먹는 패거리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에게도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하느님의 명령은 동일하다. 어쩌면 땀을 흘리며 땅을 부쳐 먹을 때라야 우리가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한당들도 속히 자신들의 존재의 근원을 깨닫고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하면 좋겠다. 오늘 하루 땀의 호수에서 느낀 행복을 되새기며 오늘 따라 유난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