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김인국 신부]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을 모실 준비에 교회 전체가 들떠있다. 먼데서 오시는 귀한 손님이라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그런데 대지가 이글대는 염천팔월의 상봉인데도 아지랑이 피는 봄날의 만남처럼 마냥 설레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라고 대뜸 불역낙호(不亦樂乎)로 맞장구치는 게 아니다. 우리 마음의 꿈틀거림에는 남다른 뜻이 있다. 그의 한국방문이 ‘교회여, 밖으로 나가자’고 호소해온 탈출정신의 구현, 그것이라고 믿어서 그렇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지는 교회”가 되자고 거듭 촉구한 그의 실천이 과연 우리 땅에서는 어떤 얼굴과 몸짓을 하게 될지 몹시 궁금하다.

▲ 김인국 신부 ⓒ문양효숙 기자
슬그머니 송구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인다. 손님에게 보일 너저분한 살림살이 때문이다. 교황이 입 맞출지 모르는 이 땅 대한민국은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 되고, 정리해고라면 언제나 합법이 되는 비정한 기업국가요, 자살률 세계최고, 출산율 세계최저인 우울하고 살벌한 불행국가다.

국방비는 세계 10위지만 복지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꼴찌인 군사국가. 혈육을 필살주적으로 삼고 있으며 또 그런 증오심을 경건하게 칭송하고, 세계최강 외국군대의 주둔과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부담을 황송해하는 야릇한 분단국가. 갯벌매립과 4대강 사업 등 대대적인 환경파괴를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자연성형국가, 국가기관이 한 번 금 긋고 나면 하루아침에 삶터를 빼앗기고 마는 조폭국가, 힘센 자가 힘없는 자를 마음껏 포식하는 신자유주의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다.

어디 그뿐이랴. 세월호의 비극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할 것 없이 경이로운 성장과 특유의 활력으로 적잖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면서 이런 현실과 원만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비하면 교황을 국빈으로 영접하게 될 대통령이 대다수 사제와 수도자들로부터 사퇴를 요구받는 떳떳치 못한 인물이라는 점은 별 일도 아니다. 어수선하고 심란하다.

교황, 한국사회가 처한 고난을 대변하는 강정, 밀양, 쌍용차 등을 방문해야

한편 교황 방한이 한국교회나 한국 사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억압과 착취, 폭력과 불평등과 같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 전체를 위한 여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야말로 목자의 순정이 쏠릴 수밖에 없는 한과 설움의 땅이 틀림없다. 진창에서 연꽃이 피듯 복음의 기쁨은 비탄의 터에서 가장 빛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어서 오시라!

지난 18일부터 언론들이 교황의 방한 스케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여러 차례 지적된 바이지만 방문지 선정 결과는 퍽 아쉽다. 교황께서 찾아가는 해당교구들의 기쁨이야 얼마든지 함께 나눠야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오늘의 한국 사회가 처한 고난을 상징하거나 대변하는 곳부터 우선 배려했어야 옳았다.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를 찾아오는 것이니 판문점 가까운 곳에서라도 동강난 허리를 어루만질 기회를 드렸어야 마땅했고, 국가폭력의 끔찍한 피해자였으면서 여전히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같은 곳은 전 세계를 향해서 생명평화를 호소할 수 있는 최적지라는 점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조정이 어렵더라도 교황의 ‘한국판 복음의 기쁨’에 쌍용차, 밀양, 강정처럼 자본과 권력이 저지르고 있는 대표적인 폭력들에 대한 우려와 관심만큼은 생략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뒤늦게라도 이런 점을 지적해야 하는 것은 방한의 주요행사인 순교자 124위 시복식 거행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교황이 도착하여 떠나는 순간까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켜놓고, 특히 시복식이 열리는 날에는 우리가 광화문 한복판을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가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서 의금부로 향하던 길임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우리가 순교시대의 야만을 기억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야수성을 들여다보고 뉘우치기 위해서다. 만일 자기 시대에 벌어지는 전란과 재앙에는 눈감으면서 흘러간 시대의 그것만을 따로 떼어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자랑한다면 이는 과거를 보상받아야겠다는 잇속이 아니냐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124위 시복식, 옛사람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이웃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이 되어야

1791년부터 약 백 년 동안 이어졌던 대대적인 박해는 무엇보다 열린사회를 지향하던 사람들의 간절한 꿈을 짓밟아버린 몹쓸 짓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밀양이나 강정을 특정할 것도 없이 지금 어디서나 흔히 만나는 일상이다. 그러므로 8월 광복절의 시복식은 옛사람들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동시에 오늘 우리 이웃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나아가 도처에 창궐하는 폭력과 약육강식 현실에 대한 성찰과 함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제안하는 대담한 담론의 장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목이 잘려가면서도 신앙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선조들 앞에 올리는 합당한 사례가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순교역사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한 채 그저 신앙의 열정으로만 찬미하는 데서 그쳤던 지난날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원리가 우리 삶 전반을 지배, 구속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맞서는 당당한 신앙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교황방한이 한낱 속빈 강정 같은 국빈방문이 아니라, 평형수를 빼버리는 바람에 복원력은 물론 영혼마저 잃어버린 채 가라앉기만 하던 자들을 위한 새벽의 달음박질이 되기를 바란다. 지나고 보면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었다. 가만히 느껴보자. 희망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한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 받던 자들이 이제는 세상의 버림받고 박해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주는 따뜻하고 거룩한 언덕, 거기가 명동성당”(1998년 MBC 스페셜 ‘명동성당백주년’의 클로우징 멘트)

*이 글은 <한겨레> 6월 16일자에 실린 '복음의 기쁨이 한국에 온다'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김인국 신부
(마르코)
청주교구 옥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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