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6]

벌써 6회를 맞는 글에서 필자는 한 철학자의 성찰을 나름대로 요약하려 한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이 철학자의 통찰에 기반을 둔 현대 평신도에 대한 성찰은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1. 한병철의 <피로사회>

철학자 한병철은 2010년 독일어로 <피로사회>(Mudigkeitsgesellschaft, 2010)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독일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병철을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필자는 우선 그 분량을 찬미하고 싶다. 수첩 같은 작은 크기에 70쪽 밖에 안 되는 얄팍한 책이라서 양복 속주머니에 쏙 들어간다. 독일어 원본이 너무도 얇아서인지, <피로사회>의 한국어 번역본은 한병철의 <우울사회>라는 강연 원고를 첨가해서 조금 두껍게 나왔다. 그래도 ‘128쪽 밖에’ 안 된다. <우울사회>를 제외하면, 각주까지 포함해서 77쪽이다. 비트겐슈타인 이후 가장 얇은 철학책의 반열에 들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점 만으로도 참 고맙고 반갑다.

아마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은 이 책이 독일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시대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5쪽). 과연 이 책은 번뜩이는 영감으로 가득 차 있고, ‘피로사회’ 라는 말을 한국에서도 유행어로 만들었다. 그 이후 ‘XX사회’라는 말이 유행처럼 나왔다.

2.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시대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쪽).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12쪽). 이를 조금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의학적으로 지난 세기는 바이러스 또는 박테리아를 발견하고, 면역학이 득세한 시기였다.

과거에 사람들은 수많은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세균과 바이러스 등을 발견하여 질병의 원인을 알아냈다. 그리고 면역학을 통해 그런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았다. 홍역이나 천연두는 중세까지 무서운 질병이었지만, 이제는 간단한 예방주사만으로 해결된다. 우리는 일생동안 수많은 백신 주사를 맞는다. C형 간염 백신이니 자궁경부암 예방 주사니 하는 광고를 보면, 건강한 성인도 예방 주사를 맞아야만 사는 세상인 것 같다. 결국 ‘예방 접종’ 은 전 생애를 걸쳐 필수적인 일이 된 듯하다.

한병철은 ‘면역학적 시대’였던 지난 시대가 사고방식과 삶의 습관도 면역학을 닮았다고 관찰한다. 그는 면역학 자체가 아니라 ‘면역학적 패러다임’(12쪽)을 주목했다. 마치 백신처럼, 면역학적 패러다임에 물든 정신은 타자성을 맹목적으로 막으려 한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12쪽)

면역학은 내 몸의 ‘외부’에서 들어온 것, 곧 외부에서 침입한 세균과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다. ‘이질성’과 ‘타자성’을 소멸하려고 한다. 밖에서 온 것, 외부의 것은 ‘부정적’인 것이고 나, 우리, 내부의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냉전은 모두 이런 도식을 따른 것이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한결같이 ‘남’을 소멸시키려고 하였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종교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3. 우리에게 익숙한 패러다임

이런 식의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다”(15쪽). 모두가 경계 없이 뒤섞이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나와 남의 구별은 뚜렷하지 않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의 자녀들이 외국에 사는 교포 3세들보다 더 한국 사정에 밝을 수 있다.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에 분노하는 한국인은 외국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한국 정부에 항의하는 데모를 조직하거나 신문광고를 낸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이질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15-16쪽)을 보고 있다.

한병철은 이 책에서 한국의 예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냉전 시대인 한반도에 면역학적 패러다임은 엄연한 현재로 보인다. 북한의 위협이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북은 부정적인 것이고 남한만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사상을 퍼뜨린다. 특히 면역학적 패러다임에 맞춰, 우리 내부에 침투한 북한 세력, 곧 종북이나 빨갱이를 색출하여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실제로 ‘붉은 바이러스’ 등의 표현을 쓴다. ‘사상적 예방 접종’ 등의 용어는 예비군 훈련 등에서 실제로 쓰이는 용어이기도 하다. 교회에서도 이런 패러다임이 작동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골의 문화’와 거친 정치적 언어

게다가 필자는 한국에서 낯익은 몇 가지 사고방식을 낡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성골의 문화’이다. ‘내부’는 가능한 외부의 때가 묻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지키는 것이 좋다는 것이 면역학적 사고방식이다.

특히 핵심 세력은 가장 순결하고 순도가 높은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을 선호한다. 어렸을 적부터 모범생이고, 공부도 잘하고, 행실이 바르고,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조직을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성골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계급’을 만든다. 대개 ‘중심’에서 시작한 사람은 평생을 ‘중심’에서 끝낸다. 한국에서 ‘스펙’이란 중심에서 얼마나 가깝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가려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저마다 스펙으로 자신의 ‘순도 높은 내부성’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둘째는 ‘논쟁의 전투성’이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논쟁들이 ‘건전한 합의’와 ‘차이점의 확인’을 남기지 못하고, ‘거친 언어 그 자체’만 남기는 현상은 자주 지적된다. 논쟁의 상대를 ‘공동체 내부의 동료’로 바라보지 않고, ‘외부’와 ‘타자’로 인식하면 절대 ‘합의’에 이를 수 없다. ‘종북’이라는 말은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면역학적 사고방식에서 ‘외부’는 불순한 곳이다. ‘불순분자’의 고향은 가장 적대적인 외부, 곧 북한이다. 그곳으로부터 ‘감염’되었을지 모르는 사람들은 발본색원, 사전차단, 박멸 등의 대상이다. 게다가 ‘종북’은 외부의 타자가 내부로 들어온 존재다. 바이러스나 세균같이, 그냥 놔두면 온몸을 망가뜨리는 공포의 대상이다.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종북’이라는 낱말 자체는 ‘척결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밖에도 면역학적 사고방식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이나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그렇다. 종교적으로는 ‘순수한 핵심적 내부를 향한 동경’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외부와 친근한 모든 요소를 척결한 채, 고결하고 순수한 모범 성직자의 집단으로 종교적 조직의 핵심을 유지하려는 사고방식이다.

5.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한병철은 푸코가 말한 ‘원형 감옥의 규율 사회’를 면역학적 사고방식에 충실한 사회로 보는 것 같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24쪽).

한국의 일부 보수는 이런 규율 사회를 선호한다. 감옥, 학교, 군대 등의 통제사회가 그렇다. 교회의 일부 모습에서도 이런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은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관찰하며, 이제 사람들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라고 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이상 23쪽).

성과사회에서 규율의 부정적 패러다임은 ‘할 수 있음’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 성과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엄청난 규칙을 적용한다. ‘바쁜 현대인’은 이렇게 탄생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스스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움직인다. 분명히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28쪽).

그러나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는 훨씬 크다. 아무도 명백히 시키지 않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엄청난 강도의 노동은 일생을 관통한다. 유치원부터 성인까지 늘 바쁘게 빈틈없이 살다 죽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성과를 향한 압박” 때문에 탈진과 우울증을 경험한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28쪽).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이다. 그리고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29쪽). 결국 세계를 긍정하고 자신을 긍정하는 과다한 자신감, 곧 ‘긍정의 과잉’은 자기 착취에 이른다.

6. 긍정의 과잉

한병철은 21세기는 더 이상 면역학의 시대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11쪽). 오히려 21세기의 질환이라고 할 수 있는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 장애 등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12쪽)이다. 외부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이 침입해서 생긴 병이 아니라 스스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질병이다. 그러므로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12쪽).

우리는 면역학의 발전에 힘입어 외부의 적을 제압했다. 감염의 경로를 차단했고 예방 주사를 맞았다. 그 결과 많은 질병을 정복했다. 이렇게 외부의 적이 침공하는 것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면역력은 왕성하고, 이제 우리 스스로를 공격하고 있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은 “긍정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쪽).

긍정성의 과잉이 가져온 폭력은 그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다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21쪽).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30쪽).

한마디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더 많은 정보와 자극을 주고 더 많이 일하여 더 많이 성과를 내라고 부추긴다. 그 결과 할 일은 쌓여가고 시간은 더 쪼개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 긍정하며 벌어진 일이기에 아무런 착취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나다. 이런 자기착취는 눈덩이처럼 스스로 불어난다. ‘삶의 가속화’이다.

그러므로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 낸다”(43쪽). 만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속에서도 만족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쁨’을 멈출 수도 없다. 그 결과 성과는 내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바쁜 상황은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 또는 완전히 타 버리는(burn-out) 질병이 발생한다. “소진 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22쪽). 게다가 각자가 스스로 수용하고 판단한 결과로 일어난 일이므로 이런 세계에서 사람은 외롭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66쪽).

7. 경색된 영혼

이상으로 책 일부를 대강이나마 요약해 보았다. 사실 필자의 눈을 끈 문장은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66쪽)였다. 평생 바쁘게, 스스로를 착취하며, 허덕이며 살다가 뻣뻣하게 굳은 영혼. 이 말보다 현대 한국인의 영혼을 더 잘 설명할 말이 있을까? 이런 현대에서 우리는 ‘복음의 기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평신도 신학자’의 자리를 기쁘게 모색하는 두 아이의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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