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15]

▲ 떼제 공동체에 입회하는 이에게 원장 수사가 수도복을 입히고 있다. ⓒDevika Usova

토요일 저녁 기도 때 새 형제가 공동체에 입회했다. 독서 후에 원장 수사가 긴 소매의 흰 전례복을 입혀 주었다. 새 형제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다. 여러 해 전에 내가 산동성에 처음 가서 제남(濟南)의 대성당에서 기도 모임을 했을 때 처음 만났다. 그 뒤로 연락을 가끔 주고받았는데 프랑스로 유학 와서 떼제를 찾아왔다. 방학 때 여기 와서 오래 머물렀던 그는 나중에 공부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돌아가 장애인 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장기 자원봉사자로 떼제에 다시 온 것이 2년 전, 작년 가을부터는 우리 수사들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수련자들을 “젊은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공동체에 입회하여 종신서약 때까지 준비하는 형제들이다. 젊은 형제는 각자 정해진 선배 수사 한 사람과 매주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하면서 동반 받는다. 또 신학과 철학, 성서학을 공부하는 한편, 공동체의 수입원인 도자기 공방 등 작업장에서 일도 한다. 집안 청소도 주로 젊은 형제들 몫이다. 젊은 형제들끼리 아침 식사를 하고 매주 나눔의 시간을 가지며 같이 산책이나 소풍을 가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공동생활을 배우고 준비해서 종신서약을 하게 된다.

입회한 때로부터 종신서약까지의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각자의 영적 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체로 3~5년 가량 걸렸다. 작년부터는 이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라온 가정이나 교회, 사회 환경이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우리는 젊은 형제들이 공동생활에 적응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올해부터는 공부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질 수 있도록 작업장에서 노동하는 것도 격주로 바꾸었다. 대신 사목 활동을 많이 하는 우리 선배 수사들이 노동 시간을 늘였다.

젊은 형제들은 또 브라질, 방글라데시, 케냐, 세네갈 등의 작은 공동체에 파견되어 일정 기간 지낸다. 프랑스와는 전혀 다른 나라, 다른 문화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체험을 한 형제들의 시각이 넓고 깊어졌다. 지금은 브라질에 한 사람이 가 있고,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수사가 이번 주에 케냐의 나이로비로 떠난다.

지금 떼제에 있는 젊은 형제는 10여 명 된다. 한두 명이 서른을 갓 넘었고 나머지는 모두 20대다. 출신은 폴란드, 슬로바키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토고, 아르헨티나, 방글라데시, 중국. 교회 배경은 가톨릭과 루터교, 침례교 등이다. 떼제에 오기 전에 하던 공부나 일은 물론 성격도 당연히 다르다. 오르간 연주를 공부한 사람도 있고, 아마 취미였겠지만 복싱 선수 출신도 있다. 불어를 빨리 배운 형제가 있는가 하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는 젊은 형제들이 일주일 동안 로마와 아시시 순례를 다녀왔다. 나는 로마에서 합류해서 며칠을 함께 지냈다. 이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들을 보면서 25년 전 내가 입회할 때가 생각났다.

▲ 젊은 형제들의 로마 순례 중 카다콤바 근처에서 ⓒ신한열

내가 공동체 입회를 결정한 것은 떼제에 와서 장기 자원봉사자로 지낸 지 1년 하고 몇 달이 더 지났을 때였다. 그 이전에 오랜 방황과 혼돈, 불면의 밤, 그리고 모색과 대화, 기도가 있었다. 마음은 먹었지만 수도생활은 하나의 모험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의 결심이 서자 당시에 동반하던 수사님은 원장인 로제 수사님과 얘기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저녁 기도 후에 만난 로제 수사님은 “한열이는 심장의 고동이 워낙 커서 수도생활이 쉽지 않을 거예요”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인자한 표정에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가슴이 덜컹했다. 다행히 곧바로 이어진 그분의 말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 지금부터는 공동체의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면 됩니다.” 첫 걸음을 내디디려는 나에게 그 말씀은 커다란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

공동체 안에서 첫 몇 해 동안 나는 좌충우돌했다. 어떤 일이나 물건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것을 나는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이 형제에게 물어보면, 저 형제가 알지 모른다고 하고, 그에게 가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나는 참지 못하고 “이건 완전히 사회주의네요!” 하고 외쳤다. 선배 수사들은 그런 나를 사랑과 인내심으로 대해 주었다.

한번은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동반하는 형님(수사)을 찾아갔다. 나의 불평과 불만을 끝까지 들은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한열이,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공동체 생활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서로 너무나 다른 남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가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손길이 숨어 있다. 일의 성과나 효율보다 형제적 사랑과 공동체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아주 천천히 배웠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수도생활의 길에 들어선 젊은 형제들. 그들 앞에 놓인 길이 늘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살기 위해 자신의 출신, 문화를 버리거나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여러 나라, 여러 교파 출신이 함께 사는 에큐메니컬 국제 공동체다. 약 30개국에서 온 수사들이 20대부터 90대까지 골고루 섞여 있다. 연중 계속되는 청년 모임을 위해서 젊은 형제들에게 여러 가지 책임을 맡긴다. 그래서 개성이 강한 여러 수사들과 짧은 대화를 자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늘 쉬운 것은 아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형제를 보면서 약간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러시아의 한 수도승은 “수도원에 들어올 때와 같은 동기(이유)로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갈파했다. 누구나 예기치 못했던 도전과 시련을 겪으면서, 혹은 공부와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동기를 발견한다는 말이겠다. 그런 성숙의 과정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전에 가졌던 이상과 꿈이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부딛혀 깨어지고 자신과 공동체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신뢰와 인내, 대화와 기도를 통해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수도원은 사랑의 학교”라고 했다. 학교는 완성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모자라는 사람이 배우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학교에 평생 다니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다음 토요일에는 프랑스 출신 젊은이 하나가 공동체에 입회한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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