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천주교가 천주교인 까닭은 신자들이 천원만 내서 그렇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돈을 적게 낸다는 것을 빗대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과연 천주교 신자들은 돈을 적게 내는 것일까? 적게 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것의 영향은 어떻게 나타날까?

한국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2004), 한국갤럽-한미준의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2005)에 나타난 종교별 헌금액수(각종 명목으로 그 교단에 내는 비용 전부)를 살펴보면 천주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의 40% 미만을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참여한 <근현대 100년 속의 한국교회>(2004) 연구에서는 신자들이 돈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적게 하는 것을 천주교의 장점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많은 사제들로부터 같은 규모의 개신교회와 성당의 헌금액수를 비교하며 기막혀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분명 같은 계층, 연령구성, 직업구성, 신자규모인데 예산과 활동에서 어떻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많은 부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렇게 돈을 안내는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말한다. 초기 백년 동안 박해를 받다보니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웠고, 박해시대에 숨어살면서 신자들이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다 보니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아는 선교사들은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재정적인 협력을 요청하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교회 안에서 돈 이야기를 안 하거나 적게 하다 보니 하나의 문화로 굳어졌을 거라는 이야기다. 일리 있는 말이다.

실제 천주교의 초기 구성원들은 가난하였고, 천주교가 그나마도 기지개를 편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니 설득력이 있다. 물론 이는 단견일 수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변변한 직업이나 소득이 적은 계층이었음에도 적지 않은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주교와 개신교가 놓여 있었던 특수한 상황, 또는 교리적인 차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신교는 네비우스 선교전략에 따라 재정, 인력의 자립원칙을 일제시대 초기부터 실천해왔다. 재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자립을 실현하려다 보니 자원을 동원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헌금 명목의 다양화, 물질에 대한 애착을 약화시키는 설교, 외부 집단과 구별되는 생활의 강조, 양을 늘리기 위한 양적 선교 등이 그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조치들은 성공적이어서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신자수로나 재정 면에서 월등히 앞서 갈 수 있었다. 대신 속물적 자본주의에 물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면 천주교는 선교국의 자금지원도 적었고, 자립적 토대도 약했다. 그러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금전을 강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해방 후에 해외 가톨릭교회로부터 받은 원조나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도회의 진출이 없었다면 상황은 일제 때보다 더 열악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백년 가까이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성당에서 돈 이야기를 안 하거나 적게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급기야는 불가피하게 성당에서 재정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도 사제가 또는 교회가 돈 이야기를 한다고 신자들이 불평을 하는 지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신자들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싫든 좋든 천주교 선교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상대적으로 개신교와 비교가 많이 되다보니 그럴 것이다. 성당에 돈을 안 내면 다른 데는 돈을 내는가? 교회 내부 조사결과를 보면(2007 가톨릭 신자의 신앙의식과 신앙생활),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좋은 목적에도 돈을 많이 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과거와 달라진 계층구성, 개신교 신자들과 거의 같은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돈을 적게 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목적에 돈을 내지 않는다면 다른 비종교적인 좋은 목적에라도 돈을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니 ‘천주교 신자는 인색하다’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이는 달리 말해 천주교가 흡인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정작 중요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능력이 적은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큰 계기 때는 오히려 힘을 발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신문을 보면 천주교 신자 정치인들이 오히려 정의구현사제단에 더 험악한 말들을 하고 있다. 또 일부 관료들은 한 술 더 뜨기도 한다. 이런 신자들과 천주교 신자가 인색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싶으실 것이다. 돈은 때로 한 신자의 신앙의 투신과 진정성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척도에서 거리가 먼 신자들로 가득한 교회가 일시적으로 호감을 얻은들 나중에 얻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내 생각에도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박문수/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문화영성대학원 초빙교수,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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