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신학]

 

결혼한 후 새 식구가 된 남편과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저는 제 자신과 삶에 대해 더 많이, 또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낯선 것은 남편과 아이들만이 아니고 그들과 살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감정을 뿜어내는 바로 저일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몰랐던 민망하고 당황스런 제 속물성과 파괴성에 내심 흠칫 놀라면서, 이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밤새 뜬눈으로 고심하던 시간이 꽤 있었습니다.

이제 10년 넘게 제 적나라한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후회만 일삼던 아둔한 저도 삶과 사람을 보는 눈과 마음이 조금은 철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미련하지 않고 지혜롭게 사는 길을 찾는 데 힘과 관심을 모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구약성경의 <잠언>에 나오는 '지혜'와 '지혜부인'은 저에게 선명한 삶의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잠언> 1-9장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구절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의 풍요롭고 자연스런 관계를 마치 시처럼, 이야기처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시고, 슬기로 하늘을 굳히셨다. 그분의 지식으로 심연이 열리고, 구름이 이슬을 내린다"(3,19-20).

"나는 곧 예지이며 나에게는 힘이 있다. 내 도움으로 임금들이 통치하고 군주들이 의로운 명령을 내린다"(8.14-15).

"나(지혜)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8,30-31).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9,5).

지혜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드실 때 함께 했던 존재인 듯, 도구인 듯합니다. 또 하느님과 사람들 가까이서 사랑스런 모습으로 뛰어노는 아이지요. 예지와 힘이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는가 하면 사람들을 초대하여 빵과 술로 대접하며 지혜를 알려주는 부인이며 여예언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머리로 그려보면, 정말 제가 닮고 싶은 이상으로 떠오릅니다. 하느님뿐 아니라 자연도 스며들듯 가깝고, 천진한 아이면서도 공정하고 너그럽고 깊이 있는 어른 모습.

오늘날 주목받고 있는 생태학에서도 생태학적 대자아, 생태적 자아라는 말로 이런 지혜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심층생태학자인 아른 네스(Arne Naess)와 여성생태학자인 발 플럼우드(Val Plumwood)가 말하는 생태적 자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지혜개념(잠언 1-9장)과 생태적 자아개념의 연관성, <우리신학>7, 2008년 봄호 참조). 특히 저는 플럼우드의 입장에 많이 동조하는 편인데, 그녀는 남성학자인 네스에 비하여 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플럼우드는 호주 원주민의 지역 생태와 삶을 연구한 다음, 여성들의 특수하고 친밀한 돌봄과 우정의 의미를 생태학과 철학을 토대로 되살려내려 합니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회자되는 사랑이 아니라, 여성들이 매일매일 특별히 잘 알고 사랑하는 동물, 나무, 강, 사람들과 고유하고 친밀하게 서로를 돌보고 우정을 나누며 책임을 지는 삶을 새롭게 보도록 초대하는 것이지요. 늘 '좌충우돌 유혈낭자'한 저를 위로해주는 고마운 학문세계입니다. 

유정원/ 가톨릭여성신학회 회원,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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