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님.

고집스런 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수천님의 활약상은 몇몇 언론보도를 통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수천님의 활약상이 주류 언론이 아닌 소규모 인터넷 언론에서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수천님의 노고를 외면하기까지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수천님의 활약에 대해 천주교 모든 신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 어떤 문제가 교회 안에 내재하고 있는지 보다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부 몰지각한 천주교 인사들의 난행(亂行)을 통해서 모범(模範)이 아닌 ‘오범’(誤範)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혹여 저에 대한 오해를 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지금까지 수천님께서 그리도 원망하시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에 단 한 번도 동참한 적도, 그 분들과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그런 인사입니다. 개인적으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기대어 사는 그저 한 명의 빈민사목 사제일 뿐입니다.

지난 6월 5일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대수천 현상, 현세 욕망의 신앙화...복음과 상관없어”라는 기사를 접한 후, 늦게나마 수천님께서 지난 3월 3일자 <제민일보>에 상소하신 “강우일 주교님께 올리는 건의문”과 현문권 신부님의 글에 대한 수천님의 답장을 일부러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수천님께서 홈페이지에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대로 “떠불”클릭하여 아주 큰 화면으로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현 신부님의 글이 제주교구 주보에 실린지 하루 반나절 만에 현 신부님께서 제시하셨던 그 방대한 교회 문헌을 수천님께서 “모두” 찾아 읽으셨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승이신 예수께서도 부활하시는데 3일이 걸렸는데, 쉽지 않은 문헌을 단숨에 독파(讀破)해 내시다니요. 가히 청출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친절하게 ‘나름’의 해석까지 곁들이신 수천님의 안목에 깊은 인상까지 받았습니다. 수천님 덕분에 교회 안의 ‘공론의 밥상’이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제 스스로 저의 게으름과 미욱함을 책망해봅니다.

이 편지는 별다른 제목 없이 그저 ‘대수천님께 올리는 첫째 편지’입니다. 제가 감히 사도 ‘바오로’를 흉내 내고 있지 않나, 하고 역정 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수천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많아서 몇 가지 주제로 나누다 보니 이리 된 것입니다. 혹시 제 글이 불편하시거나 무례했다면 미리 용서를 청합니다.

▲ 지난 4월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선교본당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밀양 고답마을 115번 송전탑 건설 현장을 방문해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정현진 기자

수천님.
수천님께서 <제민일보>에 상소하신 글을 보니, 수천님께는 ‘어디’에서 성사가 집전되는지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에서 드리는 미사 때문에 심기가 몹시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성전이 아닌 공사현장에서 봉헌하는 미사는 평신도 신심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신 걸 보니 말입니다. 또한 현 신부님의 글에 대한 답장에서도 “지금이라도 공사장에 가셔서 한번 둘러보”실 것을 권하시면서, 그곳이 “과연 하느님의 현존을 그 속에서 느끼고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곳인지”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교회법 제837조 2항을 들어 “가급적이면 많은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인지” 판단해 보시길 충고하시더군요.

수천님께 감히 묻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느님의 현존을 그 속에서 느끼고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곳”이 어디인지요? 어떠한 조건의 장소면 그리 흡족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곳”이 될까요? 그리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수천님께는 이 질문이 아마 우문(愚問)일 겁니다. 수천님 생각에는 ‘성전’만이 “하느님의 현존”을 오롯이 느끼고, ‘성전’만이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곳”이며, 또한 ‘성전’만이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일 테니 말이죠. 수천님께서는 ‘성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아마 이는 ‘성당’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교회건축물인 ‘성당’말입니다.

수천님께서 교회 문헌에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계시니 이런 설명은 사족(蛇足)에 불과하겠지만, 우리가 말하는 ‘성당’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Ecclesia’라고 부릅니다. 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모두가 중학교 1학년만 되어도 배우는 ‘Church’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Ecclesia’나 ‘Church’가 단순히 건물인 ‘성당’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Ecclesia’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건물인 ‘성당’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성전’의 의미를 폄훼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맞습니다. 수천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전’은 미사가 거행되는 ‘장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미사를 비롯한 성사가 거행되는 곳이 ‘성전’ ‘성당’ 더 나아가 ‘교회’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반드시 ‘성전’ 안에서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성전’ 안으로만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릴까요? 아마 수천님께서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에 대한 아주 오래된 정의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약 470여 년 전인 1545년에 가톨릭교회 전반에 걸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공의회가 하나 열렸습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트리엔트 공의회였죠. 물론 종교개혁으로 인해 촉발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다급한 목적으로 열렸지만, 동시에 교회의 철저한 ‘자기 개혁’을 선언했던 공의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를 지탱해온 교회의 신학, 전례 등 교회의 모든 방면에 새로운 규범을 제시한 아주 중요한 공의회이기도 합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모이고,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면 그곳이 언제나, 바로 복음의 교회다.”

수천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참된 의미의 ‘성전’은 그런 곳입니다. 번듯한 장식으로 치장된 ‘건물’이 아니라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언제나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전 안에서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성전 안으로만’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논리는 더 이상 펴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벨기에의 신학자 에드워드 스킬레벡스는 “성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마 20세기 이후, 성사를 규정한 여러 개념들 가운데 이 스킬레벡스의 말이 가장 유명한 것은 이 말이 그 만큼 성사에 대해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킬레벡스가 말하는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즉 성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필요한 곳에서 거행되는 것이며, 또한 그 장소가 바로 ‘교회’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만남”은 장소를 불문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럼 예수 그리스도와 만났던 사람들을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길거리에서, 생선 비린내 풍기는 어촌 호숫가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예루살렘의 허름한 집 2층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내어 주셨고, 심지어 누명을 쓰고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곳들이 바로 교회, 즉 “그리스도와 만남”의 장소, 성사가 이루어진 장소였습니다. 혹여나 당시에는 ‘교회’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말씀은 부디 마시길 바랍니다. ‘Ecclesia’라는 개념은 구약성경 ‘집회서’(Ecclesiasticus)의 이름으로도 사용하니까요.

수천님.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천상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곳”이 꼭 건물로 이루어진 성당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수천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겠습니까? 하물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마태 18,20)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수천님.
제 졸문(拙文)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초면에 너무 결례를 범했다고 나무라지는 마시길 청합니다. 두 번째 편지는 ‘종북사제’가 거행하는 미사의 합당성 여부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두 번째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추신 : 지면(紙面)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반론을 제기하실 분은 편집국 이메일(editor@catholicnews.co.kr)로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원고분량은 200자 원고지 8매~15매 사이로 작성해 주십시오. 원고는 검토 후 게재하겠습니다.(편집자)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를 설립하여 도시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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