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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너는 누구의 친구인가[성 프란치스코의 길, 가난의 길 - 5]
황인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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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05  16: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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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 평원에 있는 리보 토르토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길 왼쪽에 아담한 성당이 하나 나온다. 성녀 막달라 마리아 성당. 프란치스코와 나병환자의 만남을 기억하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은 본래 아르체의 성 라자로 병원이 있던 곳인데 1330년 이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봉헌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작은 성당으로 남아 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남긴 유언의 서두에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무렵에는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 성녀 막달라 마리아 성당 ⓒ김선명

성당 안 제대 오른편에는 나병환자와 그를 돌보는 성인의 상이 있다. 우느라 일그러진 나병환자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무릎을 꿇은 채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연민에 찬 성인의 표정이 생생하다. 성당 안의 명패에는 성인과 나병환자 사이의 역사가 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병환자를 포옹한 일, 다시 말해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지낸 일은 성인의 기억에서 자신의 회심을 시작하는 걸음으로 여겨질 정도로 결정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프란치스코의) 유언에 따르면 (나병환자를 포옹한) 체험은 산 다미아노에서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만난 일에 필적한다. 즉, 그는 나무판 위에 그려진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 나병으로 본 모습을 잃은 사람의 얼굴에서 ‘생생히 살아 계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만난 것이다.

어떻게 형제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둘이 아님을 복음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둘 사이를 자꾸 갈라서 그것을 우열의 관계로 두거나 심지어는 기도만 할 것이지 왜 형제에게, 세상에 관심을 두느냐고 타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야말로 그리스도교를 배반하는 일이다. 루카 복음을 보면 사랑의 이중 계명 다음에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된다.

   
▲ 나병환자와 프란치스코를 나타낸 상(왼쪽), 성당 내부 ⓒ김선명

“우리 성직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 우리는 가난을 차차 잊게 되었다. 가난하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모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아픔이 없으니 사랑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와 고통을 인식하지만 마음속에는 그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하신 말씀이다. 아픈 자기 고백이라고 할까. 추기경께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자주 찾아가셨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추기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프란치스코의 초기 동료 가운데 하나인 에지디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에지디오는 기지 있는 말을 잘 하기로 유명했는데 하루는 추기경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에지디오에게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께는 제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두 분은 저보다도 믿음의 덕과 희망의 덕이 월등하시니까요.” 무슨 뜻이냐고 그들이 묻자 에지디오가 대답했다. “추기경님들은 이 세상의 권력과 영예와 영광을 그렇게 많이 누리시면서도 구원되기를 바라고 계시니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면서도 벌 받을까 걱정이 되거든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형제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찾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강생이라든가 육화 같은 어려운 말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예수의 삶은 결국 그것이 아니었던가.

말을 타고 가던 부잣집 아들이 길을 멈추고 전에는 역겨워하던 천형의 환자에게 다가간다. 이렇게 프란치스코는 나병환자에게 입을 맞추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이는 ‘세리와 죄인들의 벗’(마태 11,19)이라는 타박을 들으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었다. 성녀 막달라 마리아 성당의 소박한 제대 앞에서 나도 속으로 물어본다. 너는 누구의 친구인가? 너는 누구의 벗인가?

   
▲ 리보 토르토로 가는 길 ⓒ김선명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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