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8]

“입으로만 신앙을 배반하고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신앙을 보존하고 있던 수많은 배교자들은 다시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무서워서 그저 몰래 몇 가지 기도나 그럭저럭 드리는 형편이었다. 성물과 성서는 거의 모두가 파괴되었고, 조금 남아 있는 것도 땅속에 파묻히거나 담장 구멍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교회사>)

지난 5월 29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회의실에서 열린 공개대학에서 백병근 선임연구원은 “신유박해가 최초로 조선 천주교회에 가해진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였다고 말했다.

천주교를 반대하고 주자학이 옳다고 믿었던 유학자들은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고, 하느님 한 분을 믿고 따르며, 죽어서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게다가 양반과 천민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으며, 교회법으로 첩을 두지 못하게 한 천주교가 조선 사회의 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백 연구원은 “정숙하고 정결한 덕을 존중해 동정생활을 가치 있다고 여긴 천주교와 달리 조선 사회는 혼인을 하지 않고 동정으로 지내는 것을 인륜을 저버리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소행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 지난 5월 29일 서울 중구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에서 백병근 선임연구원이 신유박해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배선영 기자

그러다 당시 사회의 질서를 지배했던 유교적인 가치와 천주교 교리가 조상제사를 둘러싸고 충돌하는 진산사건이 벌어졌다. 윤지충이 처형된 후, 체포령이 내려진 주문모 신부를 대신해 신자들이 순교하는 박해가 이어졌고, 1800년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가졌던 정조마저 세상을 떠났다.

11살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 대신 대왕대비 김 씨와 정조와 뜻을 달리했던 벽파가 정권을 잡았고, 1801년 1월 대왕대비 김 씨는 사학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으니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금교령(禁敎領)이 선포되고 얼마 후 대표적인 지도층 신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등은 목이 베이는 참수형을 당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었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면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머물면서 활동했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알고 덮쳤으나 이미 피신한 뒤였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강완숙의 가족들과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수했다. 음력 4월 19일 주문모 신부는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 앞에 매다는 군문효수(軍門梟首)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했다.

박해는 지방에서도 일어나 지도층 신자들이 대거 순교했다. 백 연구원은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이 체포됐고, 이들의 자백으로 전주, 금산, 고산, 영광, 무장, 김제 등지에서 2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박해가 1년 가까이 계속되자 조정은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차질이 있고 민심이 동요하는 것을 의식해, 1801년 음력 12월 22일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을 발표하고 박해를 마무리했다.

신유박해로 지도층 신자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되면서 교회는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면서, 1834년 유 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교회를 유지해야 했다.

“박해를 치르고 난 바로 뒤의 조선 천주교가 얼마나 어수선하고 비참하고 붕괴된 상태에 있었는지를 이루 다 말하기는 어렵다. 교형들을 지도하고 권면하고 격려할만한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 사형 당하였다. 명문거족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만이 남아 있는 집안이 많았다. 천주교의 광적인 원수들이 애써 잡으려 들지 않았던 가난한 자들과 천민들은 서로 연락도 없이 뿔뿔이 헤어져 적의로 가득 찬 외교인들 틈에 끼어 살게 되니…….” (달레, <한국천주교교회사>)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 ‘불효’, ‘풍속 사회 안녕 질서의 문란자’, ‘방탕’ 등으로 규정한 <토사반교문>은 언제라도 천주교를 박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다시 교회를 세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영향으로 신유박해 이전에는 서울과 경기도, 여주, 충주, 전주 등에 몰려있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 이후에는 전라도 남쪽 지방과 경상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도까지 퍼지게 되었다. 백 연구원은 “이들이 숨어서 복음을 계속 전파했고, 결국은 천주교가 더 확산되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다음 시간인 5일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장우 박사가 ‘황사영과 백서사건’을 강의한다. 이어 ‘한국 천주교회사 강의Ⅰ- 교회 설립부터 신유박해까지’ 공개대학의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 주례로 종강미사와 수료식이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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