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배용준이니 권상우니, 혹은 조인성이니 하는, 말하자면 이 시대 최고의 섹시 가이들의 공통점이 뭘까 아나요....?
물론 혹자는 연기력을 얘기하기도 하겠지만 내 견해로 그들의 연기는 그리 볼품이 없다. 혹은 잘생긴 외모 운운 하겠지만 그들 말고도 잘생긴 사람들은 지천에 널렸으며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기준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공통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복근(腹筋)이다.

그들은 참으로 우수한 트레이너를 영입하여 (때로는 그 트레이너가 인기몰이를 하기도 한다) 참으로 우수한 근육을 만들어 내고 참으로 우수한 개런티를 받는다. 물론 아무나 복근만 만들었다 해서 우수한 개런티를 보장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귀공자 같은 얼굴에 복근까지 갖춘 멋진 인간들인 것이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TV에서는 남자들이 서로 배 부분을 까 보이고 여자들은 꺄악을 연발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곤 한다. 이거 그들과 내가 같은 종족인지 참으로 의심되는 지점이다)

허나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복근이 없다. 한 때 헬스클럽을 열심히 드나들며 근육을 만들려는 시도는 해 본 적이 있다. (우리 동네에는 동네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1년에 20만원짜리 헬스클럽이 있다. 조금 허접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그렇게 한 3년을 한 결과 ‘복근’은 안 만들어졌지만 우둔살과 사태살, 그리고 이두박과 삼두박이 조금 거추장스러울 만큼의 근육을 모을 수 있었고 그것은 내 건강을 지키는 데 아주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근육이 있어야 산소의 공급이 용이하고 산소의 공급이 용이해야 지방을 태울 수 있단다. 무슨 소리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든 간에 나는 복근이 없고, 따라서 인기도 없다. 다만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할 뿐이다. 말하자면 비호감에 가까운 덩치 큰 아저씨가 바로 나다. 슬프다... 아 봄날은 갔다. 그러나 결연히 눈물을 닦고 생각해 보니 꼭 그럴 것만도 아닌 것이, 나 역시 외모 때문에 이익을 보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맞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허다하다.. 기분 좋다.

상황1 - 거리에서

나는 운전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동안 거리를 질주하는 모든 운전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미친 듯이 나의 정당함을 관철시키려 했다. (사실 도로 교통법상 언제나 내가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번번이 나는 승리했다.

나의 난폭한 운전에 소위 열이 받은 운전자가 내 앞에 차를 세우고 자기 차 문을 열고 거칠게 걸어올 때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었다. 적절히 선팅이 된 나의 1994년 엘란트라를 보는 순간 상대 운전자는 더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급기야 운전석 창문을 쾅쾅 치기에 이른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에서는 별 욕이 다 나오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천천히 창문을 내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무슨 약속이 있지 않은 한 머리를 감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는다.) 그러면 매우 극적인 반전의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창문이 다 내려지고 보통 사람의 1.5배가량 되는 기형적인 머리통과 엄청난 수염, 운전석을 꽉 채우고 있는 덩치, 그리고 (조금 연출된) 가자미눈에 껌을 질겅거릴 때 마다 드러나는 하악골 근육의 움직임.... 등등을 확인하고 나서 눈에 띄게 자세가 공손해져 가는 그를 향해,

“무슨 일인데 이렇게 차까지 세우고 뛰어 온 거요. 내가 댁한테 죽을죄라도 진 거요?”
“아니 뭐 그냥...”
“나 별로 할 일도 없고 시간이 아주 많으니 차를 한켠에 대고 얘기합시다.”
(모기 소리로) “에이 씨발.....”
“뭐라고 했소? 욕을 한 듯한데 맞소?”
(이 대목에서 차 문을 조금 열면 급하게 자기 차로 가며)
“에이 씨발...”
(너무 싱겁게 끝난 듯한 낭패감에 내가)
“이봐. 어따 대고 욕을 하는 거야. 엉? 나이도 어린 거 같은데. 이리 와..”

하면서 냅따 뛰어가면 상당히 높은 알피엠이라고 짐작되는 출력으로 매연을 풍기며 달아나기 마련이다. 가끔은 나와 비슷한 인간을 만나 애를 먹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나는 편리하게 이긴다.

상황2 - 점잖은 자리에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을 소위 정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기실 정장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이 칼럼 초반기에도 밝혔듯이 옷차림을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고, 국적 불명의 옷을 정장이라고 믿는 모든 작태에 나는 염증을 느끼는 인간이다. 그것은 이제 50에서 하나 모자란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니 언제나 트레이닝복이나 반바지를 입고 다니고 주위 사람들은 웬 고릴라 같은 인간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 있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정말이지 양복을 입었을 뿐인데.... 나는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타성의 착시 현상이다)

“토마스.... 양복 입었어?”
“와... 이렇게 멋있을 수가... 너무 잘 어울려...”
(심지어 박수를 치는 이해 못할 양반들도 계시다.)

양복을 하나 입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좌중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경험이다. 그럴 때는 매우 창피하지만 마냥 창피한 것만은 아닌 묘한 느낌이 들곤 한다.

아무튼 그래서 가끔은 나의 덩치와 우락부락한에 감사한다.
물론 그 감사는 [상황1]의 사내에게서 발견되는, 노예근성에 가까운 소시민적 서글픔과, [상황2]에서의 어설픈 타성과 관습을 보고 겪고 난 후라야, 그것도 매우 반어법적으로 하게 되는 감사지만 말이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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