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5]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교회는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이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의 시대를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은 역사의 여정을 순례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인 이 교회에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무엇일까?’하는 물음에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평화는 무엇일까?’하는 물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것이 평화다’ 혹은 ‘저것이 평화다’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성찰하며 ‘적어도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혹은 ‘적어도 저것은 평화가 아니다’ 정도로 성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성 토마스의 불신> 세부, 루벤스, 1615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한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사건인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넨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또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요한 20,19-29 참조). 예수님의 두 손에는 못 박힌 ‘상처’가,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상처’가 있습니다. 두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아물어서 흉터만 남았는지, 아니면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 피고름이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20,27)하고 이르신 것을 보면, 흉터이든 피고름이든 토마스가 오감으로 확인할 정도의 흔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든 ‘타살’의 흔적이었으므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제자들에게 건네셨습니다. 두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님의 죽음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성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평화를 이루셨고,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건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관점에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씻으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를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하느님의 길을 벗어나 범한 죄악이 너무 커서 도저히 인류 스스로는 그 죗값을 치를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십자가 죽음을 통해 속죄의 제물로 받아들여 용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외아들마저 희생 제물로 삼아 구원하시려 했습니다. 인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그 죄악을 눈감아주시고, 그냥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불의를 눈감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불의에 대한 심판, 곧 인류는 그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인류에게는 그 죗값을 치를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죗값으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절정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두 손과 옆구리)을 보여주시면서, 즉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표지를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제자들에게 건네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의 설명으로 표현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결실이며, 사랑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496항 참조).

그런데 <간추린 사회교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평화의 실패”로 단정합니다. “핵 시대에 전쟁을 정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전쟁은 재앙이고, 결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 수 있는 적절한 길이 아니며, 지금껏 한 번도 그러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새롭고 더욱 복잡한 분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97항)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평화는 단순히 힘이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를 ‘공포의 균형’이라고도 합니다)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매일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밝힙니다(<복음의 기쁨>, 219항).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평화에의 노력으로 ‘대화의 길’을 제시하며, 교회가 그 대화에 앞장서라고 촉구합니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대화의 길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제4장 III., IV., 참조).

그런데 남북 사이의 군사적 대립이 첨예하게 되면 될수록,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중·러와 남·미·일의 군사적 블록화가 강화되고, 이는 동북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또 우리는 수백 명의 시민이 탄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습니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16명이나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롭고 평화로운가?’ 하고 말입니다.

교회의 복음화(사회적 차원) 사명을 다시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자기보전’보다는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길을 나서는지, ‘평화 실현을 위해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매일 노력하고 있는지’, ‘평화의 실패인 전쟁 대신에 대화의 길에 앞장서고 있는지’ 자문합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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