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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이승만의 최대 협력자"주교회의, 장면 세우기 세미나 열어..

 

   

▲ 왼쪽부터 차례로 허동현 교수, 여진천 신부, 장익 주교, 김성태 신부, 노길명 교수, 조광 교수. 이 세미나에서는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보여준 장면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그 사상적 동력이 '반공주의'라고 밝히고 있다.  


지난 2월 4일 오전 10시부터 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강당에서 아주 특별한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의 결정으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세미나는 지난 해 12월에 이미 서강대에서 열린 유엔 승인 6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수석대표였던 장면((張勉 1899-1966)의 행적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세미나는 비록 해방 이후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장면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대상으로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 매체로 비판받았던 <경향잡지>가 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평화방송>이 후원하고 있는 이 세미나에서, 발표는 허동현 교수(경희대)와 여진천 신부(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가 맡았고, 김성태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노길명 교수(고려대)와 조광 교수(고려대)가 토론자로 초대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장익 주교(춘천교구장)가 ‘가족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장면 전 총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미나 장소인 4층 강당은 그리 크지 않은 장소 탓인지 발표자와 <경향잡지> 관계자, 그리고 취재하러 온 <가톨릭신문사>와 <평화신문-평화방송> 기자들을 빼고는 스무 명 남짓 참석한 조촐한 분위기였다. 

장면, 일제의 교회 탄압 방어하려고 저항 못해

허동현 교수는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라는 주제로 장면의 전 생애에 걸친 천주교회와 신앙이 준 영향력, 그리고 천주교회의 후원을 받아 장면이 정치적으로 입신하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장면은 일제하에서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으며, 해방이후 미군정기에 가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종래 그는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총선거에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제1공화국의 2대 국무총리(1952년), 민주당 최고위원(1952년), 부통령(1956년), 그리고 제2공화국 국무총리(1960년)를 지낸 정치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정치가이기 이전에 그는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었다.”

허 교수는 일제강점하에서 장면이 ‘한국 79위 순교자 시성식’에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하고(1925년), 서울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교의 측근으로서 17년 동안 동성 상업학교 교장을 지낼 만큼 교회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밝히고 있다. 허 교수는 “혹자는 그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며, 친일단체에 가톨릭 대표로 참여했던 점등을 지적하기도 한다”고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는데, 태평양 전쟁 당시에 장면이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간사를 맡았고, 그 단체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는 “교육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교육활동은 할 수 없었”으며 교회적으로는 일제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중간에서 도맡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했기 때문에 신앙적인 이유로 일제에 저항할 수 없었노라고 변론했다.

   

▲ 장면 전 총리(사진출처/국정홍보처)


장면, 이승만의 최대 협력자

한편 장면이 정계에 입문하고, 결국 외교관으로서 유엔에서 대한민국 승인을 얻어내고, 한국전쟁 당시엔 주미대사로서 유엔군의 참전을 끌어낸 배경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포석과 천주교회의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천주교단의 종교적 반공주의를 들고 있다.

미군정기에 스펠만 대주교가 종군 사제장으로 방한하고, 미군정청의 아놀드 소장이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며, 메리놀회의 번 주교가 교황사절로 입국하면서 천주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하였다. 천주교회는 미군정과 교감을 나누면서 이승만과 미군정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이승만은 ‘반공주의’라는 공감 속에서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를 두고 허동현 교수는 장면이 “이승만의 최대의 협력자였다”는 점을 거듭 부각시켰다. 더구나 허 교수는 “당시 냉전논리적 반공 이데올로기는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지식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적 이념”이었으며, 장면은 “남한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6.25전쟁시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국공로자”라고 평가하였다.

허 교수의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다른 학자들과 다소 견해 차이가 있어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냉전 논리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허 교수의 말대로 대다수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5.10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좌파가 선거 자체를 보이콧하고 중도파들만 겨우 출마했음에도 제헌의회가 ‘반민족자처벌법’을 통과시켰을 정도로 우파 반공주의자들이 열세였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남북협상파, 단정반대 및 중도세력을 포함하여 무소속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하여 무려 62.9%(총 210석중 126석)를 차지하였으며, 지배계급이며 친여당적 성격을 지닌 대한민국당이 11.4%, 구집권세력이면서 야당계인 민주국민당이 11.4%를 차지하여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했던 이승만은 실각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사실상 반공주의는 친일경력을 가진 경찰력에 의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켜야 했던 친일파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한국 천주교회도 이러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과 반공주의는 사실상 허 교수도 부분적으로 인정하듯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입장이었고, 천주교회 역시 반공주의에 대한 전통적 입장과 현실적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것이다.

신앙인 장면, 선택 여지 없어

   
▲ 선서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 발제에 대한 논평에 나선 노길명 교수는 “장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가톨릭신앙이 결합되어 있는 분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고, 해방 후에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국가형태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부연 설명하였다. 한편 노 교수는 해방 이전에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교회가 해방 이후에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나서게 되었으며, 장면이 가톨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 당시 교회가 반공주의 사목정책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장면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교회의 방침에 따라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허동현 교수의 발표는 "진보진영이 장면을 분단의 죄인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바로잡는 글"이라면서, 오히려 장면에 대해서 다시 살펴봄으로써 장면과 그 당시 교회의 행태가 이후 천주교회가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사회참여에 나서게 하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단독정부 수립 역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필연적인 길이었고, 비극의 씨앗이라기보다 성공의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허 교수의 입장에 공감하였다.

자유민주주의, 장면과 교회의 신념

한편 여진천 신부는 두 번째 발제를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해방 이전에 이미 교황들의 반공주의를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들의 종교탄압 상황을 알고 있었으며, 연길과 북한의 종교탄압을 경험하면서 “이 땅에 세워질 국가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를 기대”하였으며, 미군정아래서 행동의 시대를 강조하던 비오 12세 교황의 방침에 따라 정치적 참여에 나서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향잡지>와 <천주교회보>를 복간하고, 가톨릭청년>과 <경향신문>을 창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 신부의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한국의 지도자들, 특히 노(기남) 주교와 장면은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에 함께 하였고, 자유 민주주의 독립 국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이렇게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교회의 노력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독재 시기에, 이 땅에 민주화를 위해 김수환 추기경 등 지도자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적극 사회참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경향잡지>, 중립지 아냐.. 

논평을 맡은 조광 교수는 역사학자 입장에서 여 신부의 발표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여진천 신부는 발표에서 <경향잡지>를 ‘중립지’라고 표현하였으나, 조광 교수에 따르면, 당시 미 정보부에서 나온 보고서에는 ‘극우지’로 보고 있다면서 정확한 사실 확인을 주문했다.

이어 교회의 반공주의에 대해 논평하면서, 해방 이전의 반공주의를 해방 이후의 반공주의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잘못이며,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 체제가 방공(防共)연맹을 맺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 침략에 정당성을 얻고 저항세력들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반공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은 제국주의 파시즘에 저항하였으며, 조광 교수의 말마따나 사실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 가운데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북한의 종교탄압, 이유 알아야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서 종교탄압이 극심했다는 발제 내용에 대하여, 조 교수는 그 탄압의 이유 역시 규명되어야 한다면서 몇 가지 점을 추가로 지적하였다. 조 교수에 따르면, “북한에서 1946년 민주개혁을 시행하면서 3정보 이상의 교회 소유 토지 역시 몰수당했지만, 실상 토지개혁은 18세기 이후 실학자들과 농민들이 줄곧 주장해 온 일이며, 1945년 프랑스 주교단도 토지개혁을 요구했으며, 해방공간에서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을 해야 했을 정도로 남북이 모두 공감했던 사항인데, 그걸 종교탄압으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북한에서 종교가 탄압을 받은 이유 역시 밝혀야 한다면서 “교황 비오 12세를 ‘반공교황’이라고 부를 정도로 교회가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교회는 당시 일제의 협력세력이었다고 규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김일성조차도 <세계와 더불어>라는 회고록에서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정권의 ‘극좌모험주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 선포식(사진 위)과 이를 보도한 16일자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DB

‘건국론’은 이승만 역할 강조론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최근 일고 있는 ‘건국론’과 관계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에도, 사진을 보면 ‘정부수립’으로 보았지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면서 “지난 해 6-8월까지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는데, 자칫 교회가 여기에 편승해서 ‘건국’을 입에 올리는 것은 좀 그렇다”며 우려했다. 조광 교수에 따르면, ‘건국론’은 이미 한국 사학계에서 ‘이승만 역할 강조론’으로 정리되었으며, “여기에 장면 선생을 대입하면 한국교회 역시 견강부회가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장면은 건국 논리와 상관없이 장면 자신의 논리로 행동했음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세미나를 마무리하면서 장익 주교는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지금의 눈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그 시대의 상황에서 봐주기"를 희망했다.

현재 장면 전 총리와 관련된 책으로는 <한알의 밀이 죽지않고는>(장면, 가톨릭출판사)이라는 회고록과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허동현, 분도출판사) 등이 출판되어 있다. 장면 전 총리를 둘러싼 논란은 결국 명예 회복에 관한 것일 텐데,  일제하 친일 문제에 대한 논란은 접어두더라도 현재 조선일보 등 보수세력과 현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8.15 건국절' 운운하는 '이승만 세우기'에 교회와 장면 전 총리가 들러리를 서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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