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산법 지배하는 대한민국에 필요한 가역적 출판

세월호 침몰사고를 겪으면서, 박노자는 “이번 사건은 한국형 자본주의 토양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나게 돼 있는 ‘사회적 대량 타살’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한국형 자본주의는 여태까지 사람들을 죽여 왔는데, 이번 참사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처럼 그 구조적 원인은 인간 생명에 대한 관심은 아랑곳없이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을 견제할 중립적이며 ‘공공성이 있는 국가’가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대한민국의 주류사회는 결코 ‘영원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떠오르는 책이 한 권 있다. 나가이 다카시가 지은 <영원한 것을>이다. <묵주알>과 <만리무영>으로 유명한 이 작가는 자신의 겪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건에 대해 자전적인 소설을 썼다. 그는 이 책 후기에서 “멸망할 것은 멸망하고 사라질 것은 사라졌다. 류우키치(주인공)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고 쌓아올린 온갖 성과도 결국 사라져 없어질 물질이었으므로, 한줌 재로 변한 것이다. 언젠가는 재로 변할 것을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류우키치는 현기증이 났다”고 썼다. ‘재를 위한 일생’을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자는 게 나가이 다카시가 <영원한 것을>을 쓴 이유다.

다카시는 “우라카미 교회도 전멸에 가까웠다. 동양 제일인 대성당은 벽돌 산이 되어버렸고, 만 명 가운데 8천 명을 주님이 불러 가셨다. 몇 세기 박해에도 꿈쩍 않고 성장하여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라고 적었는데,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교회의 본분이 무엇인지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가 몇 년째 탈핵 문제를 자신의 사명으로 선포하고, 밀양 할매들과 연대하는 기쁨으로 사는 데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오로딸, ‘종교의 근본’을 묻거나
교회사명에 대한 ‘인간적 응답’을 찾아가

▲ 바오로딸 출판사가 출간한 책들 ⓒ한상봉 기자
<영원한 것을>은 바오로딸 출판사에서 1963년에 교회 인가를 받고 1964년에 초판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50년 가까이 된 책인데, 당시에 바오로딸에서는 ‘유니버셜문고’라는 이름으로, <그 이상의 것들>을 비롯해 깊은 신앙적 성찰을 담은 영적도서를 연이어 출간했다. 이 책들은 일반 출판사의 어느 책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되어, 청소년뿐 아니라 신앙적 열정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바오로딸은 신학서적보다는 신자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신앙서적 위주로 책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바오로딸에서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와 세스브롱의 <성인 지옥에 가다> 등 대단한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실 교회에 대해 ‘종교의 근본’을 묻거나, 교회 사명에 대한 ‘인간적 응답’을 찾는 글들이다. 이를테면 <성인 지옥에 가다>는 제목만큼 획기적이다. 우리는 천주교 하면 으레 성당에 머무는 사제들을 떠올리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천주교 사제는 공장 지대인 사니 마을의 노동사제였다. 그 신부는 지옥문처럼 열려 있는 탄광촌 갱도에 이르러 ‘고향 같은’ 하느님의 땅을 발견하는 사람이었다.

이 책들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복음’을 연결 짓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종교와 다르다. 종교를 부적처럼 여기고 액땜을 하려고 봉헌금을 내는 사람들, 사제 생활을 철밥통으로 여기고, 짐짓 점잖은 체하지만 로비와 권력투쟁을 통해 주교가 되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을 지적질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직자들의 관료화와 출세주의를 비판했듯이, 이 책의 작가들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던 백성을 나도 사랑한다”고 몸으로 증거하는 이들을 다룬다. “눈먼 풀포기도 돌 사이에서 돋아날 것이고 슬픈 새도 우짖을 것”이라며, 예수도 그런 슬픈 눈매를 가진 이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고 다짐한다. 그분 역시 지옥문(화엄, 華嚴)에서 해인(海印)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전한다.

종교서적이라면, 탐욕의 산법(算法) 통하지 않는 다른 세계 갈망해야
처세든 수행이든 공동체의 아픔과 희망 담아야

적어도 종교서적이 인간을 다루려 한다면, ‘그 이상의 것’을 다루어야 한다. 시인 황지우가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이라는 시에서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탐욕의 산법이 통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갈망해야 한다.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산법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바오로딸의 접근은 사뭇 생경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이것’을 가역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은 이미 세속화로 항진(航進)하는 대한민국에서 탐욕에 호소하는 ‘그래 그거야, 그거’라는 유혹에 비해 무력하지만 절박하게 요청된다.

생존 자체가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비정규직이 산재한 조건에서, 여전히 서점가에서 처세술을 안내하는 책들과 자기계발서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아마도 공세적 생존전략을 짜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책들이 환영받는 반면에, 도피적 생존전략에 익숙한 이들은 틱낫한이나 달라이 라마, 불교 수행서 등에 심취하는 듯하다.

한 편이 동물적이라면, 다른 한 편은 식물적 태도를 지닌다. 이를 단순히 ‘전사’와 ‘현자’로 구분할 수는 없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단련하는 전사는 위험하기만 하다. 가련한 주변 사람들이 상처입고 자원으로 대상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체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투신하지 않는 ‘지혜’는 자신의 우물 안에 자신을 가두기 마련이다.

▲ 분도출판사의 책들은 최근 안셀름 그륀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지만, 인간과 삶에 대한 신학-이론적 기초를 다지고, 삶의 이면에 뿌리박힌 영성의 문제를 주로 다루어 왔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을 만하다. ⓒ한상봉 기자

분도출판사, 신학-이론적 기초를 다지고,
삶의 이면에 뿌리박힌 영성의 문제 파고들어

분도출판사의 경우에는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면서도 영적 깊이를 담보하기 위해 최근 들어 안셀름 그륀에 천착한지 꽤 되었다. 안셀름 그륀은 성경과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과 융의 분석심리학을 접목시킨 세계적인 영성 지도자다. 그는 베네딕토회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 재정관리자로서 20년 넘게 활동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체의 경영자들도 교육하고 있는데, <사람을 살리는 리더십> 등 많은 저서가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는 영적 깊이와 복음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는 생활방식을 전파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분도출판사가 한국 사회 안에 유명해진 것은 해방신학과 관련된 책들을 엄혹한 유신시대에 출간했던 임 세바스챤 신부의 덕이 크지만, 영성작가인 드 멜로와 헨리 나웬, 토마스 머튼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이 난다.

분도출판사의 책들은 최근 안셀름 그륀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지만, 인간과 삶에 대한 신학-이론적 기초를 다지고, 삶의 이면에 뿌리박힌 영성의 문제를 주로 다루어 왔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을 만하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잘 안 팔리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여전히 있다.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처럼 실제적인 삶의 문제와 학문적이며 영성적인 깊이를 통합한 책들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 출판계 변종, 개신교 번영신학을 따라가는 서적들
차동엽 신부류의 성공철학의 위험성은 ‘종교의 세속화 전략’

▲ 차동엽 신부 저서 <무지개 원리>
한편 천주교와 관련된 책 가운데 ‘변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자문기구인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했던 천주교 사제인 차동엽 신부가 지은 <무지개 원리>와 <희망의 귀환> 등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비상구”라며 차동엽 신부가 내지른 <통하는 기도>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이중에서 <무지개 원리>는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될 만큼 성공한 책인데, 이 책의 슬로건이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는 점에서 ‘만사형통’을 바라는 세속의 바람을 흠뻑 끌어당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색이 천주교 사제가 ‘만사형통’을 바란다면, 그 자리에는 철저하게 실패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서있을 자리가 없다.

차 신부는 이 책에서 “되도록이면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제발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말고’ 이 땅에 컨그레츌레이션 문화를 확산시켜 내실 있는 3만불 시대에 진입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성공한 이들로 예시하는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출세한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이다.

차 신부류의 성공철학은 ‘물질적 부가 구원의 증거’라는 개신교의 번영신학을 닮아있다. 세속의 논리와 다를 바 없는 이런 희망의 전도사들은 자기분투를 촉구하며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면서, 우리 사회 불행의 원인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부당한 사회구조와 무도한 정치적 · 경제적 세력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버린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서 암벽 타는 법을 자랑하는 하러에게 티벳의 양복재단사 여인이 한 말이 선연하다. “정말 우리와는 다르군요. 선생님들은 항상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모두 버리려고 애쓰니 말입니다.” 이게 종교서적이 갈 길이다.

* 이 글은 격주간 <기획회의> 367호에 실린 글을 보완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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